“예수원은 제 집입니다. 저는 한 번도 한국을 떠나 미국에 가서 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없는 상태에서 아직까지 제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습니다.”
예수원을 일군 대천덕 신부의 뒤를 이어 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현재인 사모가 신앙계 월간〈플러스인생〉과 인터뷰했다. 한국인에 대한 첫인상,
대천덕 신부 소천 이후 일상에 대해 진솔한 고백을 담았다.
“처음 밟은 땅 한국, 전쟁의 흔적 속에서도 밝은 사람들 놀라워“
현재인 사모가 대천덕 신부와 함께 한국땅을 밟은 것은 1957년. 전쟁의 상흔이 여전히 남았을 때였다.
현 사모는 당시 곳곳에서 전쟁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존 데일리 주교님의 초청으로 성공회 신학교 재건을 위해 1957년 미카엘 신학원 교수로 한국에 왔습니다. 당시 존 데일리 주교님이 우리를 데려간 곳은
유한양행 여름 별장이었습니다. 처음에 그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 때는 곳곳에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었습니다.
한국은행이나 대한성공회 성당에 가도 총알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전쟁의 상흔에도 불구하고 밝고 단정한 모습의 여성들, 흙길을 명랑한 얼굴로 활보하는 거리의 사람들은 현재인 사모에게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정말 놀라운 건 사람들이었습니다. 학생들은 교복을 입었는데 굉장히 가지런하고 구김살 없는 단정한 모습이었고,
여성들은 아름다운 한복을 입고 거리를 나섰습니다. 거리는 흙탕물이고 흙길인데도 사람들의 얼굴은 늘 명랑했습니다.
전통 한복을 입고 장 보러 가고 길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이 무척 활기차 보였습니다.”
1965년 예수원 설립 이후 현재인 사모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강원도 태백에서 지내고 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12명의 자원자들과 아들 벤, 남편이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첫 건물에 세워지고 저와 딸 옌시가
예수원으로 이주했습니다. 1980년도에 마을에 전기가 들어올 때까지 십 수년을 전기 없이 지냈습니다. 촛불로 생활했고, 아주 로맨틱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입주 후 1년 반쯤 지나 둘째 딸 버니를 낳았습니다. 버니는 하나님이 증거로 주신 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헙하는 과정에 주신 특별한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현 사모는 예수원 안에서도 소기도실을 가장 즐겨 찾는다. 그 곳에서 예수원 초창기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고 추억에 잠긴다.
“예수원의 모든 장소가 다 제게는 특별한 기억을 살려주는 곳입니다. 다 추억이 서려 있습니다.특히 예수원 소기도실은 저희 가족이 13년간 살던 곳이기에 추억의 장소입니다. 소기도실에 젊은 외국인 친구들이 와서 많이 기도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들과 함께 기도한 것이 생각납니다.”
이런 추억이 담긴 곳이기에 대천덕 신부 소천 뒤에도 한국을 떠날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지금은 자녀들과 이곳에서 함께 살 수 있어 감사하다는 그다.
“제가 기대하지 않았는데 딸과 아들, 며느리와 함께 예수원에 살 수 있어서 참 감사합니다. 물론 직계 가족 외에 예수원 식구들도 있습니다.
예수원은 제 고향이자 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