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애 전도사(여, 36세, 온누리교회, 인천시 주안동) -
교통사고를 당해 척추를 다치게 되면서
어릴 때 우리 집안은 제사를 가장 큰 행사로 생각하는 집이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갈 무렵에는 어머니가 위장병으로 몹시 고통스러워 하셨다. 병을 고쳐보려고 절에 다니셨는데, 절에 갔다오시는 날이면 “그림에서 본 예수님이 꿈에 보이며 더 아프셨다 고 하셨다. 그러다 이웃에 사는 집사님의 안내로 3일 금식기도로 병 고침을 받으시고는 기독교로 개종하셨다. 그날 이후로 가족구원을 위해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하셨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셨던 아버지의 핍박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특히 내가 어릴 때, 나를 위해 굿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을 크게 회개하시고 기도하시면서 오히려 나를 “주의 종으로 서원 하셨다 는 것이었다.
90년 1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느라 명절에도 집에 가지 않던 나는 웬일인지 그날 집에 가고 싶어졌다. 집에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척추를 다치게 되었다.
그때 어머니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병 문안을 오셨는데 동행하신 사모님이 성경책을 주시면서 이것 다 읽으면 퇴원하게 될 것이라며 기도해 주셨다. 그런데 그 말이 저주의 말처럼 들려 손님이 나가자마자 성경책을 집어 던지며 화를 내었다. 곧 퇴원할 수 있을 줄 알았던 나는 다리에 마비가 오면서 종합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수술을 해도 가능성이 없다 고 하는 절망적인 병원의 검진 결과도 이미 받은 상태였다.
좌절감으로 인하여 우울증, 신경쇠약 그리고 수 없는 자살시도
좌절감으로 인하여 신경이 예민해진 나는 점점 포악해져갔고, 어머니는 병원의 기도실에서 눈물을 흘리시는 날이 많아졌다. 함께 병원 생활을 한지 1년쯤 되었을 때, 독한 약을 오래 복용하다 보니 이제 위에서 피까지 토하게 되었다. 너무나 지쳐 가퇴원을 하여 집으로 돌아왔지만, 우울증과 신경쇠약으로 여러 번 자살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비몽사몽(非夢似夢間)간에 찬양의 멜로디가 들려왔다. 나는 혼자 걷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그 멜로디에 이끌려 어머니가 다니시던 교회의 성전으로 갔다. 그곳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엉엉 울었다. 그러다 새벽이 되면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꼬박 3일을 연속 찬양에 이끌려 성전으로 인도되었고, 원인도 모른 채 그곳에서 목놓아 엉엉 울었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절뚝거리며 혼자 교회에서 집으로 걸어올 수 있었다. 그날 밤 꿈에 흙탕물 속에서 검은 그림자에 쫓기던 나를 하얀 모시 옷 입은 분이 내 몸을 씻겨 주셨는데, 꿈 얘기를 들으신 어머니는 ‘예수님께 죄 사함을 받은 것`이라며 감사기도를 드리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머니가 다니시는 교회는 찬양멜로디도 새벽종도 치지 않으신다는 것이었다.
그 일 이후 나는 점점 예수님을 생각해 보게 되었고 여러 사람의 기도 확신으로 수술을 하였다. 수술 중 무의식 상태에서도 고통스러워 ‘살려주소서, 주여 살려주소서` 하며 절규하다 깨어났더니 중환자실이었다.
기나긴 사투(死鬪) 끝에 92년 2월, 나는 거짓말처럼 병원 문을 혼자 걸어 나왔고, 그 해 3월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후 1년이 지나 우리 집은 5남매 중 오빠만 빼고 모두 구원받게 되었다. 집안의 추도예배 때, 그렇게 술 마귀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깍듯이 나를 주의 종 대우를 해주시며 예배를 인도하게 하시고는 “선산에 기도원을 지어서 하나님 일로 귀하게 쓰고 나를 경비라도 세워 주면 기도원 마당 쓸다가 천국 가렵니다 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할렐루야!
신학교를 졸업한 나는 유학을 준비하며 비자까지 받았었다. 그런데 같이 가기로 했던 여 전도사님은 비자가 안 나와 그 문제를 놓고 함께 기도하다가 “전도사님, 개척하세요. 제가 1천만 원 헌금할게요 라는 말을 불쑥 해 버렸다. 교통사고 보상금중 일부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대사관에서 “비자가 취소되었다 며 연락이 왔다.
우리는 함께 21일 금식기도를 하였고, 하나님 응답 따라 같이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성전 세를 위하여 아이들을 모아 과외를 시작하였고, 그들을 전도하여 아동부와 학생부를 개척하였다.
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 건물 2층을 놓고 교육관으로의 소망이 불일 듯하여 기도하였더니 ‘선교원을 하라`는 응답을 주셨다. 그러자 뜻밖에 동생이 결혼 비용으로 준비한 돈을 내 놓았다. 어려움 속에 1년 후 졸업식을 마치자 자모들이 하나, 둘 자원하여 교회등록을 하여서 자연히 여전도회와 청년부도 이루어졌다. 그러다 보니 나는 밥 먹을 시간조차 없이 바쁘게 뛰어다녔는데, 주위 사람들이 교회와 선교원을 인정해 주자 자부심과 교만이 생겼다.
여러 가지 책임을 맡고 분주하게 일하다 보니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도 크고 작은 마찰로 불편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4주년 감사예배를 드리고 나는 점점 지쳐갔다. 주위에서는 “선교원을 그만 두라 고 만류하였다. 그러나 선교원을 통해 교회가 성장한 것을 생각하면 쉽게 그만둘 수가 없었다.
선교원의 화재 현장의 비참함
어느 날 목사님과 성도들이 함께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선교원에 화재사고가 났다 는 것이었다. 황급히 달려가서 본 화재 현장은 정말 비참했다. 여러 보상문제로 아이들을 바닥에서 교육할 수밖에 없었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자 아이들은 점점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경찰서로 불려 다니고 주위의 질시를 느끼자 두통이 심해졌다. 결국 스트레스성 신경쇠약증으로 병원에 다녔다. 날로 아이들이 줄고 교인들도 어떻게 되어가나 가끔 구경만 하러 올 정도였다.
그러나 여기서 주저앉으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조롱하며 비웃을 것을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나를 도와주시던 어머니를 통해 사채를 빌려 선교원을 복구하였는데 복구비는 처음 시설할 때 보다 훨씬 많이 들었다. 그러나 힘겹게 새 단장을 하고 나니 흩어졌던 교인들이 머쓱해 하며 하나 둘 돌아와서 교회가 차츰 안정되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쓰러지셨다 는 연락이 왔다. 겨우 아물어 가는 마음의 상처가 다시 확 뒤집히는 것 같았다. 신학기 준비하느라 낮에는 정신 없이 일하고, 밤에는 어머니 병원에서 간호하며 지냈다. 호전되는 듯 하시던 어머니는 결국 20일 만에 소천 하셨는데 정신이 아찔할 만큼 슬픔을 느꼈다.
40일 작정 금식 기도를 하고 났더니...
장례를 마치고 형제들의 권고로 40일을 작정하고 강남금식기도원에 올라가게 되었다. 다시금 15일 금식을 작정하였는데, 말씀과 찬송으로 몸과 영혼의 병들었던 부분들이 소생되는 것을 느꼈다. 그 말씀은 때로는 꿀송이 보다 달게 느껴졌고, 때로는 채찍이 되어 나를 부서뜨렸다. 성경을 읽기 시작하여 25일 만에 1회 통독할 수 있었다. 금식 3일째 그렇게 괴롭히던 두통이 말끔히 사라졌다. 매일 3알씩 먹던 두통 약을 끊게 된 것이다. 5일째부터는 안경을 안 써도 잘 보이고 어지럽지가 않았다. 심한 난시로 늘 조심하며 지냈었는데, 성경 말씀 그대로 흉악의 결박이 끊어진 것이었다.
12일째 되는 날 형제들이 걱정이 되어 찾아왔다. 생기 있는 내 모습에 모두들 놀랐다. 금식 15일을 마치고 모든 것을 얻은 듯 기뻤으나 보호식을 하면서 또 앞으로의 일에 대한 염려 걱정이 생겼다. 순간 나는 깜짝 놀라서 ‘다시 금식기도를 해야겠다`는 소망이 생겼다.
‘지난 일을 주님께 맡겼으니 미래까지 맡길 수 있게 해 달라`는 심정과 사역의 길을 위해 다시 10일을 시작했다. 예배 중에 목사님이 치유를 위한 기도시간에 ‘나 자신도 모르는 채 몸 속에서 자라고 있는 더러운 병마는 물러갈지어다`라고 선포하실 때 크게 ‘아멘` 하고 답하였는데 몸이 뜨거워지면서 저절로 아랫배에 손이 갔다.
숙소로 돌아와 화장실을 갔더니 붉은 피에 쇳가루 같은 것이 섞여 한 스푼 정도가 변기에 떨어졌다. 현기증을 참으며 ‘주여 도와주소서` 하고 신음을 하며 기도를 하였다. 그것을 3번 쏟으니 하혈이 멈추고 몸이 가벼워졌다.
이제야 하나님께서 강남금식기도원으로 불러서 금식을 시키신 뜻을 깨닫고,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온전한 헌신을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