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기석 장로(남, 70세, 은혜로교회, 전라남도 광주시 건국동) -
주일학교에서 20여 년간 봉사하는 믿음을 주신 하나님
처음 내가 예수님을 알게된 것은 6·25 때 부상을 당해서 병원에 있다가 선교사님을 통해서 전도를 받으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세상에 나와서 직장생활 하면서는 신앙생활이 유지되지를 않았다. 그러다 34년 전, 어릴 때 주일학교를 다녔던 아내가 다시 교회를 나가면서 1년 뒤 함께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그 교회에서 세례를 받으며 술, 담배를 끊고는 많은 축복을 받았었다. 80년도에 장로 직분을 받으며 교회내의 크고 작은 일들을 앞장서서 감당하였는데 특히 주일학교에서 20여 년간 봉사하였다. 여러 가지 교회 일을 맡아 할 때마다 늘 하나님께서 감당할 힘을 주셨다.
그 당시 나는 광주에서 철강회사를 운영했었는데 96년 12월에 그만 부도가 나고 말았다. 우리 물건을 가져간 사람이 부도를 내자 나도 자연히 도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정수표 단속범’으로 전국 수배령이 났었다. 광주에서는 아들집까지 압류되어 있을 곳이 없었다. 재산도 수십 억을 갖고 있다가 빚을 갚고나니 고작 11만원이 전 재산이었다.
3, 4년 간 이리 저리로 피해 다녔는데 나이가 많아서 크게 단속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식들 집에도 가 있고 기도원에도 가서 지내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 그동안 장로 60여명과 함께 교회 일을 이끌어가며 건축에 앞장섰던 것, 개척 교회를 도왔던 것 등이 내 생각으로 했던 것은 아니었나하는 회개를 하였다. 장로가 되면서 교만했던 것도 있었을 것이고, 교회 일을 자세히 알다보니 무조건 목사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지 않았던 일들을 회개하였다.
우리는 자부(子婦)가 얻어준 방에서 지내며 40일을 작정하고 매일 4번씩 11시까지 예배를 드렸다. 작정기도가 다 끝나자 하나님께서는 ‘왜 그러고 다니느냐?’는 응답의 말씀을 주셨다. 그 음성에 순종하여 4년 만인 2000년 1월 광주에서 자수를 하였다. 그 날 바로 나는 구속되었는데 검사가 나를 보더니 자기도 장로 아들이라면서 오히려 죄를 감해주려고 애를 썼다. 검사는 피해자들에게 전화하여 “그만 용서해 주라”고 권면하기까지 하였다. 약 20일을 끌다가 관선 변호인을 붙여 주어서 만나보니 예전에 잘 알고 지내던 박장로였다. 그는 “검사가 누구 잘 도와 주라 하더니 이곳에 형님이 어쩐 일이냐?”며 안타까워했다.
역경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믿으면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주신 하나님
다시 재판부로 넘어갔는데 교도소 안에는 사형수와 강도가 있었다. 10년 이상 형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 보내신 뜻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기도하였다. 그런데 그 중에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는데 교회에서 나를 본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바울이 디모데를 믿음의 아들로 삼듯 나는 장로로서 그를 제자로 임명하였다.
그리고는 “우리가 역경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믿어야 산다”고 설명해 주며 이 안에서 소망을 가져야 하므로 이곳을 소망을 아는 교회로 이루어지게 하자고 그를 가르쳤다. 우리는 매일 아침 9시 반으로 시간을 정해 놓고 예배를 드리기로 하면서 하나 둘 모인 것이 17명이 되었다.
재판 과정이라 사형수도 미결수와 같이 있었는데 강도는 말을 안 들어도 사형수는 말을 들었다. 성경이 모자라서 교도관에게 요청하여 성경책을 받아서 20명중 17명이 예수 믿기로 하고 아침마다 예배를 드렸는데 매일 아침 10시면 TV가 나와 대부분 모이기 때문에 30분간 예배를 잘 드릴 수 있었다. 그들이 어려운 찬송을 잘 모르므로 곡조가 쉬운 411장과 182장을 주로 불렀다. 나는 제자 삼는 최군에게 “이제 너를 최집사로 임명한다”며 만약 우리 하나님이 나를 내보내 주시면 네가 이 일을 대신해야 한다며 격려하였다.
밤 9시면 취침해야 되는데도 어떤 때 나는 12시까지 말씀보고 기도하여도 교도관이 용납해 주었다. 특히 이 방이 ‘소망교회’가 되어 여기 들어오는 자마다 은혜 받고 예수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마지막 재판 과정의 질의에서 “세상적으로 욕심부리다 그런 것도 아니고 또 어디다 숨겨놓고 남을 해치며 부도는 안 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하고 덧붙여 말하였다.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고 2000년 3월에 출소하여 교회목사님께 안부전화를 드렸더니 목사님은 “휴직장로로 해놓았으니 빨리 교회에 오라”고 말씀 하셨다. 그러나 형제 같고 친구 같은 사람들의 돈을 못 갚아 준 것이 부끄러워서 교회를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고나서 마음에 위로를 받고자 바로 강남금식기도원으로 갔다. 그 해 8월 17일에 기도원에서 기도하다가 ‘8월 15일 특별사면’ 이야기를 듣고 광주지법에 전화하니 사면으로 복권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음 부도났을 때는 도망 다니면서도 지옥 안 가려고 주일에 겨우 예배만 드리며 하나님을 원망했었는데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이다.
그런데 작년 7월부터는 다리가 몹시 아프기 시작하였다. 강남금식기도원에 가서 1주일 동안 기도했는데도 아픈 곳의 통증은 그대로였다. 집에 와서도 몸이 계속 안 좋으니까 한의원을 다니며 약을 먹었다. 그러나 보름을 다녀도 차도는커녕 걸어다니지도 못할 정도였다. 나는 이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려 보자는 생각으로 다시 기도원으로 올라갔다. 버스에서 내려 성전까지 절룩거리며 올라가는데 10번 정도 다리가 아파 쉬었다 가야만했다. 그 날 마침 원장목사님이 설교 중에 ‘믿는 사람이 무슨 약을 먹느냐?’고 하시며 ‘신·구약이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믿음으로 ‘아멘’ 한 뒤 그 날 낮부터 병원에서 준 약을 끊고 예배 때마다 안수를 받으며 병낫기를 간구했다. 하루 5번 예배 중 쉬는 시간에 산책을 해보니 몸이 훨씬 수월하고 편했다. 작정한 날 마지막 시간까지 예배드리며 안수 받고는 힘을 다하여 내려가는데 다리가 하나도 안 아팠다. 나는 일부러 차 타는데 까지 뛰어갔다. 뛰면서 “내 다리 다 나았네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믿음으로 간구하여 깨끗이 치료받은 것이다.
효도관광을 마다하고 기도원으로 올라가 기도 드리며
지난 어버이날에는 자녀들이 “방콕(Bangkok)을 다녀오라”고 했다. 그러나 나와 아내는 강남금식기도원에서 다시 40일 작정예배를 드리고 싶으니 그 여비로 쓰겠다고 하여 효도관광을 마다하고 기도원으로 올라갔다. 우리 부부는 하루 1식하며 예배드렸는데 무한한 감사가 마음에서 솟아났다. 그리고 성령께서 감동을 주셔서 자녀들이 용돈을 주어 모아 놓은 작은 비상금을 건축헌금으로 드릴 수 있었다.
또 좋은 환경에서 늘 찬양하며 말씀 듣고 있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다보니 ‘내가 기도원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아침마다 대성전 청소를 하게 되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기뻐서 하는 일이라 힘도 들지 않았다. 움직일 때마다 건강 회복 시켜 주신 것이 감사할 뿐이다. 우리는 오늘도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각 교회와 목회자들을 위하여, 특히 광주에서 돈 못 갚아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이제 우리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시든지 생명 있을 때까지 감사하며 순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