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용원(남, 36세, 전도사, 비전교회, 경기도 부천시) -
열등감에서 시작된 본드 흡입
독실한 기독교 가정의 2남 3녀 중 막내로 나는 태어났다. 나의 부모님은 내가 7살이 되던 어느 주일날 교회를 가지 않겠다던 내게 밥을 굶기실 정도로 신앙에 대해서는 철저하셨다. 행복했던 우리 가정에 어둠이 드리워진 것은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께서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후에 가정형편이 어려워지기 시작된 때부터였다. 편모슬하(偏母膝下)에서 자라면서도 나는 활달한 성격과 초등학교에서 중학교까지 한 두 번을 제외하고는 전교에서 늘 1등을 한 모범생이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는 소년체전에 육상선수로…중학교 때는 씨름선수로 활동할 정도로 운동과 공부에 뛰어났었다.
그런 어느 날 아버지 친구 분의 권유로 중학교 3학년 때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도시로 이사를 오면서 새로 사귄 친구들이 부유한 가정에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단칸 셋방에서 엄마, 형, 누나와 함께 네 식구가 머리를 맞대고 잠을 자야하는 처지였다. 집에 들어가는 것이 싫어졌고, 그런 나의 환경이 창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감수성이 예민했을 시기였기 때문에 그때부터 겉돌기 시작하면서 잦은 가출과 술, 담배 그리고 패싸움을 하고, 불량서클을 결성해 돈을 갈취하는 등…그때부터 본드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학교와는 점점 멀어졌고, 서클 친구들과 폭력사고를 쳐 결국 학교에서 퇴학처리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본드를 마시고 하늘을 난다고 높은 나무에서 날개 짓을 하며 땅에 떨어져 하반신 불구가 되었고, 본드를 하다가 과도로 친구를 찌르는 등 친구들에 범죄행각은 대범하고 잔인해져 갔다. 아무튼 본드를 하면 옷이나 얼굴에 묻고 냄새가 나서 대체약물을 찾던 중 약(속칭 : 러미라, 아티반, 루비킹)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20알 정도에서 점점 양이 늘어갔다. 그러면서도 전학간 학교 담임선생님의 배려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약물은 내 생활이 되었다.
그러던 중 군대 영장이 나왔다. 군입대 전 애인도 변심하였다. 나는 탈영을 결심했으나 포기했다. 그러나 군 생활 6개월만에 첫 휴가를 나와 왼쪽 손가락을 자르고 말았다. 그 일이 있은 후에 내 얼룩지고 깨어진 인생을 위로하기 위해 마약과 대마초를 복합적으로 사용해서 인사불성(人事不省)의 모습을 하고, 길바닥에 엉금엉금 기어다니기를 매일처럼 반복해갔다.
그렇게 생활하던 중에 조직선배들과 불교계의 종교사건에 연루되었고, 내가 데리고 다니던 후배들이 신종 범죄사건으로 언론기관에 대서특필되는 대형 조직범죄가 터지면서 나는 ‘교사혐의’라는 혐의로 수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도피생활 중 유흥업소 종사자들과 사창가 종사자들에게 마약을 제공해 주고 나는 아예 그곳에서 살았다. 그리고 도피생활 4년 만에 모든 사건이 종결되었다.
마약중독자가 되어서 포기한 삶
그러나 나는 이미 오래 전에 마약중독자가 되어 있었다. 마약에서 깰 때쯤이면 공허감에 시달리기 일쑤였지만 혼자서 마약을 중단 할 수 있는 의지력을 상실한지 이미 오래 된 상태였다. 마약을 끊기에는 나는 너무 깊은 수렁에 빠져갔다. 마약으로 인한 금단현상이 나타났다. 기억력감퇴, 체중감소와 폭력적이고, 단순한 일에도 흉기를 들고 난동을 부리고, 탈모증세가 나타나 머리는 물론이고 몸에 있는 모든 털이 다 빠졌다. 흡사 외국영화의 E. T처럼…눈썹마저 빠져버린 내 모습, 거기에다 손가락까지 없는 내 모습은 문둥병자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그 후로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해 다녔고, 대낮에는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변장한 모습을 하고 밤에만 활동을 했다. 그리고 병원에서 1년 이상 치료를 받아 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런 나는 밤만 되면 마약에 취해서 시속 200㎞를 넘나드는 죽음의 레이스를 시작했다. 그로 인해 3번의 대형사고를 냈다. 자동차는 모두 폐차가 되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두 번째 사고 때 어깨가 으스러져서 병원에 입원하기는 했으나 나머지 두 번의 사고에서는 털끝하나 다치지 않은 기적 같은 사고를 경험하였다. 마지막 사고가 나던 그 순간에 ‘나를 살려주시면 하나님을 믿겠다.’고 순간적인 기도를 하며 “꽝”하는 소리와 함께 의식을 잃어버렸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마지막 사고가 나면서 내 마음에 동요가 있었고, 어릴 적 하나님을 믿었던 실낱같은 종교적 신앙 양심은 꿈틀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물로 십여 년이 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신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로 기도원을 찾게 되었다. 기도원에서 40여 일을 남을 위해서 봉사하면서 난생처음 행복감을 느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처음으로 육체적인 평안과 영적 자유를 체험할 수 있었다. 비록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못했지만, 최소한 마약을 단약(斷藥)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기도원을 내려왔고 단약(斷藥)은 물론 담배마저도 끊고, 형이 경영하는 건물관리 용역회사에서 운전과 건물을 청소하는 청소부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몇 년 동안 나지 않던 머리도 나기 시작하는 기적이 일어났고, 하루하루 삶이 즐겁게만 느껴졌다.
그런 내게 삶이 무너지는 유혹의 손길이 다가왔다. 가장 친했던 친구가 이혼을 하고서 찾아와 호주에 가서 우리의 망가진 인생을 다시 시작하자고 제의했고, 우리 두 사람은 부픈 꿈을 가지고 호주라는 낯선 땅으로 떠났다. 점차 그곳의 생활에 적응해 갔다. 하지만 그 친구는 그때까지도 마약을 하고 있던 터라 외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향에 대한 향수를 마약으로 달래곤 했다. 점점 단약과 금연을 고집하던 나도 매일같이 행하여지는 마약과 카지노의 도박 앞에 뿌리 없는 내 신앙은 6개월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다시 방탕의 길에 들어섰으나 …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신 새로운 인생
그러던 중에 어머니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셨다는 소식에 호주의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왔다. 어머니는 기적적으로 완치 되셨지만 나는 다시 탈모가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내 생활은 다시 방탕의 길로 이어졌다. 히로뽕과 마약, 유흥비 마련을 위해서 적게는 수천만 원, 많게는 수 억대의 도박판을 벌여 자금을 만들었다. 그러다 구속되었고, 십 수년 동안 잘도 피해 다녔지만 결국 마약 전과자라는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서른 살을 넘기면서 신체적으로 엄청난 금단현상이 나타났다. 우선 치아가 망가져 열 개 이상의 틀니를 해야했고, 성 기능 장애와 극심한 무력감과 우울증, 부분적인 기억상실 등, 점차 위험할 정도의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더 이상 혼자는 지탱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나는 살고 싶었다. 누군가가 구원해 주지 않으면 이런 모습으로 생을 마쳐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주변 동료들이 구속되는 상황 가운데 나는 자의반 타의반 기도원으로 도피하게 되었다. 기도원에 오기는 왔지만 삶에 의미를 잃어 버렸고, 내 머리 속에는 죽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했다. 그런데 기도원에 온지 3일 되던 날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나에게 믿을 수 있는 표징을 보여달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성령의 불이 임하면서 혀가 꼬부라지며 방언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밤새도록 울며 회개 기도를 드렸다.
그러면서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마약, 대마초 모든 것을 일순간에 버렸다. 그리고 많은 영적인 체험과 하나님의 은혜로 신학의 길을 결심하였다. 마약으로 많은 것을 잃었지만 9년 동안 나지 않던 눈썹과 머리가 거의 정상이 되었으며, 21일간 금식을 통하여 성 기능장애도 기적처럼 회복되었다. 할렐루야!
그리고 교회 안수집사님을 통해서 한국마약퇴치본부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전문 지식을 위해 2급 상담사 과정도 마쳤다. 지금은 주의 종으로 또 마약퇴치본부 자원상담자로, 보호관찰소 및 구치소 교육강사로, 중고등학교 예방교육강사로 일하면서 남은 인생을 마약으로 고통받는 영혼들을 위로하며 살아가길 원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도제목은 국내에는 없는 “마약 중독자들을 위한 치료공동체”즉‘전문기관’을 세우기 위해 기도 중 10일 금식을 작정하고 2001년 1월 10일 강남금식기도원에 도착했다. 금식5일째 되던 날 2만평의 부지를 쓸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땅을 쓰고 땅값은 천천히 주어도 된다는 것이다. 성령 충만을 주시고,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