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너무나도 부족한 저에게 이 글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전라북도 익산에서 다리가 기형인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불같은 성격의 아버지와 순종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저는 가정의 불화였고, 감당하기 힘든 존재였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외할머니와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그 당시 전주예수병원에서 외국인 의사에게 대수술을 받았고, 1년이 넘는 기간동안 깁스 상태로 살아야 했습니다. 유전이 아닌 부모님의 실수였기에 엄마는 더욱 가슴 아파 하셨고, 저를 데리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통원치료를 받기 위해 날마다 업고 병원에 가셨다고 합니다. 성공적인 수술이 아니었는지 지금도 정상적이지는 않지만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합니다.
고 3시절 몇몇 친한 친구와 함께 대흥침례교회에 친구의 인도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몇 달간 주일 낮 예배에 참석하였지만, 저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다닌다는 것 이외에 별다른 의미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 가면 너무도 편안하고 가슴이 따뜻했습니다. 또 친구가 저와 다른 친구들을 위해 중보기도 했을 때는 눈물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그 후로 대학에 진학하면서 교회와는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갑자기 친했던 친구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는 친구의 변한 모습에 거부감이 들었고 부담스러웠습니다. 저를 교회로 인도하려고 했던 사람은 참으로 많았습니다. 직장에서 알던 언니의 소개로 둔산중앙침례교회에 다닌 적도 있었습니다. 청년부 에배와 소규모 기도모임에 참석 했었는데 통성기도 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도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화연락과 직장 심방으로 저를 괴롭히는(?) 전도사님도 정말 싫었습니다.
교회는 한 번 들어가면 빠져 나오지 못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자연스럽게 교회에 대해 배척하고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가끔씩 어떤 사람들은 저의 얼굴만 보고 교회 다니는 사람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그런 말들을 그냥 무심코 지나 쳤습니다. 그러던 중 언젠가부터 갑자기 동생이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그러면서 귀가시간이 늦어지고 주말에 함께 지내지 못해 저는 항상 불만이었습니다. 그리고 2001년 98학번 헌신예배를 통해 동생의 인도로 처음으로 둔산제일감리교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동생이 연극을 준비했다고 하여 순수하게 연극을 보려고 교회에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도하는 모습들이 너무나도 무서웠고 또 교회에 나오라고 저를 붙잡을까봐 연극이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 후로 저는 동생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너는 교회에서 아주 사는구나?’ ‘나한테는 황금 같은 일요일이야. 갈려면 너나 가...!!’ 어릴 적 수술 후 평소 잘 아프지 않았던 다리가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더욱 약해지고 조금만 무리해서 걸어도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아팠습니다.
웹디자이너로 일하면서 거의 매일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해야하고 주말도 없이 일을 하다보니 피곤에 지쳤습니다. 매일 저녁 자는 동생을 억지로 깨우면서 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울며 사정하고 다리를 때려 가면서 고통을 참아야 했습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이면 더욱 심해서 지쳐서 잠이 들곤 했습니다. 찜질이나 물리치료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의 이런 모습을 보고 동생은 저의 다리를 놓고 40일 기도회(바나바 사역)를 통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생은 저에게 언니의 다리가 나으면 기적이니까 주일만이라도 교회에 같이 다니자고 부탁했습니다.
저는 하는 둥 마는 둥 의심하며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저는 잠을 잘 자기 시작했습니다. 동생은 저에게 물었습니다. “언니 요즘 잠 잘 자는 것 같은데 다리 안 아프지?” “아니!? 나도 잘 모르겠는데?...” 동생이 물어보는 의도는 다리가 나았으니까 교회에 같이 가자는 말을 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웹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고 어쩌다 생기는 주말은 정말이지 황금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누구에게 빼앗기기 싫었습니다.
또한 동생이 다니는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방언이라는 것을 하는데, 저는 그것이 너무도 무서웠고 적응되지도 않았으며 이상한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얼마 후 저의 회사에서 갑천으로 회식을 가게 되었습니다. 갑천 변 돌계단을 내려 가면서 넘어지고 인대가 늘어나고 뼈가 조각나서 5월 한달 간 깁스를 해야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저의 집은 4층입니다. 목발로 층계를 오르내리는 일은 저에게 너무나도 힘이 들었고, 매일 땀으로 범벅이 되다시피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회사 생활은 너무나도 즐거웠습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회사가 조금 어려워지기 시작했고, 동시에 일에 대한 실증과 창작능력의 한계에 부딪히면서 곧 회사를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방문교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시간을 활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머지 시간은 프리랜서로 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회사를 여기저기 알아보았는데 모두 떨어졌습니다. 얼마동안 아르바이트로 홈페이지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습니다.
그 때 동생은 교회에 방문 교사로 일하는 사람이 많다면서 안나 언니(3청년부 부회장)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안나 언니와 동생은 교회 앞 만나에서 약속장소를 정하자고 했습니다. 저는 “나는 너희 교회 앞에 가기도 싫어! 다른 곳에서 만나면 안돼?” 그러나 저는 어쩔 수 없이 만나에서 안나 언니를 만나게 되었고, 제가 알고 싶은 정보보다는 ‘직장인의 밤’행사에 꼭 오라는 권유 아닌 협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교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는 그 동안 방언에 대해 잘못된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리가 나았는데 교회에 나가지 않아 또 한번 다리를 다쳤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날 행사에서 간증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고 방언과 교회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앞으로는 주일예배는 꼭 나가겠다는 동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음날 주일 2001년 12월 16일 예배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새가족반에서 권태준 형제가 말씀양육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고, 동생을 통해 많은 간증들을 들었지만 40일 동안 교회에 매일 나와야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그때까지도 주일예배만 참석하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직장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동생은 더욱 적극적이었고, 한번만 나와서 듣고 마음에 안 들면 그만두라고 했습니다. 2001년 12월 20일 저는 지금 다니는 회사에 첫 출근을 하게 되었고, 그날은 19기 말씀양육을 시작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날 정말 가기 싫어서 동생에게 전화했습니다. “미진아! 나 꼭 가야해?” “언니 준비 다했어? 몇 분 안 남았네... 빨리와!” 저는 택시를 타고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하고 그렇게 말씀양육을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동생이 2000년 송구영신예배 기도 제목 중에 2001년에 꼭 언니가 말씀양육을 듣게 해달라는 기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확하게도 2001년 마지막 말씀양육인 19기 말씀양육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한해동안 많은 고통을 겪었고 삶에 대한 많은 회의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동생의 기도와 하나님의 예비하심으로 그 동안 가지고 있던 교회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 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 등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말씀 양육을 통해 하나님은 정말 좋은 말씀들로 저를 인도하여 주셨고,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던 세월들과 저의 무지함들로 동생을 핍박하고, 하나님을 무시했던 것들을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정말 많은 눈물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동안 가지고 있던 방언에 대한 두려움들과 그것을 무시했던 저는 기도에 대한 말씀을 듣고, 정말 많이 회개하였습니다.
40일을 정말 꼭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루하루 몸이 아파 기도가 되지 않아 너무 힘들기도 했습니다. 같이 시작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마음이 조급했습니다. ‘너는 네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 저도 기적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요.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기도의 능력주세요! 저는 왜 안 되나요. 제발 만나주세요! 바로 지금 이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002년 1월 18일 오늘이 아니면 정말 죽겠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르짖었을 때, 최명희 자매의 중보기도를 통해 저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저 노래로만 들리던 찬양이 저의 고백이 되었습니다. ‘소현아! 내가 너를 진정 사랑한단다. 세상 속에서 힘들고 지칠 때 문제는 나에게 맡기고 내게 기대라’ 하나님은 그렇게 저를 따스한 햇살이 너무도 포근한 푸른초장, 주님의 무릎에 누워 쉬게 하시고 저를 안아주셨습니다. 그 크신 사랑을 감당하기가 벅찼습니다. 저는 방문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일하는 곳은 회원 수가 그리 많지 않아 이동거리가 상당히 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차가 꼭 필요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제 기도에 응답해 주셨고, 차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교회 형제님들이 자신의 일처럼 돌보아 주었습니다.
2년 가까이 운전을 하지 않았고, 시동을 켜고 끄는 방법도 모르며 도로주행연습도 하지 않은 제가 차를 가지고 온 첫날부터 담대함으로 운전 할 수 있게 도와 주셨습니다. 정말 저의 능력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불연 듯 전화 한 통화의 연락을 받고 체불임금을 일부분 응답해 주셨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에 대한 모순들과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이 있다면 어디 한번 기도해서 내 다리를 낫게 해보라고 말하던 제가 단 몇 개월 사이에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저는 혼자 있을 때 항상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소망을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십니다.
수업을 하러 가는 차 안에서 찬양을 들으며, 저는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내가 어디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항상 저와 동행하시는 주님이 계셔서 든든하며 언제나 안전합니다. 하나님은 제가 80만 영혼구원에 대한 기도를 할 때 진정한 소망을 품게 하시고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정말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은 너무도 부족하지만, 저를 통해 하실 일을 기대하며 나의 문제 응답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나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어질 것을 확신합니다. 아직 응답 받지 못한 것들, 정말 가장 적당한 날에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실 하나님을 기대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칭찬하실만한 사역을 하기를 소망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이끌어 주신 목사님과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이곳으로 나를 인도해 준 동생 미진이와 동역자인 형제자매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이자리에까지 올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고 역사해주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영원한 나의 중심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