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비젼은 방송 선교사!!!

10월 18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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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선교

♥ 나의 비젼은 방송 선교사!!!

   

2014.08.03 09:12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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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정적인 마음으로 복음선교하는 김성일 방송선교사!!!

나는 어릴 적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나운서들의 목소리를 흉내 내면서 막연히 아나운서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때는 국어 책을 유별나게 잘 읽는다고 칭찬을 듣기도 하였고 중학교 때는 싸구려 무선마이크를 이용해 이웃 몇 몇 집에 음악방송을 하다 옆집 아저씨에게 전파방해로 꾸중을 들은 적도 있었다.
나는 무척 어려운 가정에서 자라 정상적인 교육 수순을 받지 못했고 뒤늦게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통해 벼락치기 공부를 거쳐 안경사 전공을 하게 되었고 자격을 갖게 되자 안경원 경영으로 방송과는 거리가 먼 생활로 바쁜 삶을 보내야 했다.

32세의 뒤늦은 결혼 후 35세의 나이인 19861월 젖먹이 남매 아이 둘을 데리고 아내와 함께 미지의 땅 파라과이로 이민을 떠나게 되었다. 문화도 다르고 언어가 다른 파라과이에 정착한 나는 직업인 안경업을 시작하였고
비교적 한국보다는 저축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재미를 보았다
. 파라과이에는 당시 12000여명의 우리 한인동포들이 살고 있었는데 사업들이 잘되어 꽤나 괜찮은 자가용을 굴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동포들은 주로 수도 아순시온의 중심시장인 4시장(한국의 남대문시장 격)주변에 한인타운이 형성되었고 길거리에 나가면 한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4
시장 주요 점포들은 거의 우리 한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파라과이가 그만큼 경제적으로 살기가 좋았다는 얘기다.

이민 온지 3(1988)쯤 되었을 때 누군가가 파라과이에도 한인을 위한 방송이 필요하다며 하루 1시간짜리 AM 라디오방송을 시작하였는데
그 당시 동포 신문이라고는 주간지가 있었지만 한국에서 누군가 여행자가 들고 온 주간잡지 등을 복사해서 내보내는 정도로 한국소식은 한두 주일 뒤에나 알게 되는 것이 전부였다
.
현지 동포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파라과이 현지소식도 스페인어를 모르는 기성세대에게는 현지 방송을 들어도 반 귀머거리가 되어야 했고 현지에서 성장한자식들에게 무슨 내용이냐고 묻는 답답한 생활이었다.
그러한 와중에 방송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 동포들에게는 얼마나 반갑고 기쁜 소식이었는지 모른다
.

한인타운 모 레스토랑 행사장에 마련한 방송요원 공개 테스트 모집을 거쳐 대사관과 한인회를 비롯한 동포유지들의 깊은 관심 속에 개국기념행사도 번듯하게 치루었다.
방송은 저녁 9시경에 시작이 되었는데 주로 한국가요를 진행하며 파라과이 동포소식을 전하는 등 별로 특별한 정보를 얻기가 힘든 모양이었는지 매일 매일의 프로가 소극적이고 한계가 있는 반복적인 방송으로 일관했다.

나는 조그마한 사무실에 녹음실이 마련되어있는 그 스튜디오를 자주 기웃거리면서 방송을 준비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것이 호기심이라기보다는 내 속에 있는 무언가가 꿈틀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30대 후반의 내 나이에 쓸데없는 망상이 아닌가 하는 자책을 하면서 억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방송은 시작한지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삐그덕 거리더니 결국 중단하고 말았다. 나의 실망도 대단히 컸다 

나는 1989년 이민지에서 가정적으로 폭풍우 같은 큰 어려움을 당한 후 신앙적으로 획기적인 변화를 갖게 되었다.

한국을 떠나오기 수년전 성령의 크신 은혜를 체험하면서 주님 앞에 서언한 경험이 있었는데 거의 10년이 지나서야 그 약속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나의 삶의 가치관이 크게 바뀌게 되었다.
그러면서 돈을 벌어 풍요롭게 살아가기 위한 삶보다는 주께서 선교의 비젼을 주시는 사건이 있었다. 나는 이 시대의 어떠한 곳에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할 겨를도 없이 방송선교라는 꿈과 비젼을 위한 삶으로 목적이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에 소재한 전 방송인 출신 김준형씨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설립한 영상선교회에서 비디오제작에 관한 교육을 받는 기회를 갖게 되었고 1990년 파라과이에 영상선교회 지부를 설립하게 되었다.
파라과이 전국을 누비며 파라과이를 소개하는 다큐멘탈 비디오를 제작하였고 선교사들의 활동을 소개하는 프로를 제작 CTS TV 땅 끝 이야기를 통해 소개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파라과이에 파송된 선교사들과 기도모임을 시작 1993년 현지 종교법인 라틴아메리카 초교파 선교협의회 (M.I.L.A)을 설립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1996년 이민생활동안 모은 전 사재를 털어 선교법인 중앙선교센타 겸 한인라디오방송 3층 건물을 완공하기에 이르렀다.
 
모두가 현실을 모르는 무리한 일이라고 비웃었고 가족으로부터의 반대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리고 건물을 완공한지 2년만인 19989월 현지 FM 방송을 임대하여 매일 1시간짜리 라디오프로를 만들어 방송을 시작하였다.
MD
디스켓에 녹음을 하여 60KM 떨어진 곳에 매일 다녀와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새롭게 탄생한 한인방송에 기대를 거는 동포들에게 빠르고 좋은 소식들을 전해야 한다고 하는 책임감과 기쁨을 갖고 열심히 뛰었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5개월 후 우리 스튜디오에서 10 분 거리에 있는 방송으로 옮기게 되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러나 방송전파 대여료를 감당하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방송을 시작 할 즈음 줄 이은 현지은행 파산과 동포 금융기관의 도산이 동포경제를 풍지박산으로 만들었고, 우리 동포들의 경제가 어려워지기 시작하였다. 누구하나 방송을 위해 선뜻 후원금을 내놓는 사람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방송의 중요성은 비례적으로 더욱 커지고 운영을 위한 경비는 충당이 되지 않는 상황이 되어 개인적인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최악의 어려움 속에서 진행해야만 했다. 왠만한 일은 몸으로 때워 거의 모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동포사회에는 광고를 할 만한 기업체도 없었고 전혀 수입을 기대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2000612일 비록 300W의 저출력이지만 자체 방송을 개국하게 되어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 주님의 명령을 완수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는 김성일 방송선교사!!!


하루
12시간의 방송을 통해 평소 하고 싶었던 다양한 프로 등을 균형있게 구성하여 동포들에게는 꿈같은 방송으로서 자리를 잡게되었다.
방송건물은 건축할 때 방송용으로 완벽한 방음시설을 하였기에 파라과이 현지 방송들도 부러워 할 정도로 훌륭한 녹음시설을 갖추었다.
방송은 자원봉사자 몇 명이 1주일에 한 두 차례 몇 시간씩 봉사를 해 주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중요하고 어려운 일들은 내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방송을 하느라 아내에게 맡기고 소홀히 하였던 개인사업도 현지인들의 농간으로 법적인 함정에 빠져 모두 몰수당하는 등 재정의 어려움은 갈수록 극에 달했고 자원봉사자들도 긴 시간을 무보수로 봉사하다 결국은 여러 가지 이유로 모두 떠나고 말았다.

남은 건 우리가족뿐이었다. 파라과이에서 자란 현지 대학1년생인 아들 대현이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 애경이가 방송사역을 도왔다. 가까운 이웃은 지금이라도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고 했지만 나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이제 방송은 나의 몸 일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한일 월드컵이 열리는 2002년 동포들의 삶속에 함께하는 방송으로서 동포사회의 밝은 곳을 조명하고 어두운 면을 들추어내는 사역 중에 한인사회를 뒤흔들어 놓은 폭력조직의 흉계를 저지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은 그 폭력조직이 그들의 모종의 계획을 위해 한국의 모 텔레비젼 방송의 기자들을 불러들여 동포 어린 남매 살인사건으로 현지 감옥에 수감 중인 한인청년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무죄를 입증하려는 것이었다.
S
방송의 PD의 시도는 결국 왜곡된 보도로 방송을 하게 되었고 그 방송을 이용한 폭력조직의 숨은 또 다른 흉계에 대한 동포들의 불안감으로 한인사회는 마치 미 서부시대 악당들이 시골동네를 장악하며 마음대로 주무르던 상황이 재현된 일이 있었다.

S 방송의 호소력은 대단했고 한국의 시청자들은 분노했다. 네티즌들은 연일 이 사건을 다루었고 억울한 그 청년을 구해야 한다고 난리였다.
현지에 부임한지 4개월밖에 안된 신임 한국대사는 2년 전 일어났던 이 살인사건에 대하여 아직 제대로 상황파악도 안된 상황에서 PD의 몰래카메라와 의도적인 유도질문으로 PD가 필요로 하는 대답을 녹취했고,
현지 여러 한인증인들의 증언을 의도적으로 왜곡편집 하는가 하면 폭력조직이 준비한 현지 거짓증인들을 검증 확인도 없이 프로에 사용하였다.

살인사건 초기부터 계속 관심을 갖고 증거자료와 정황, 그리고 등장인물에 대한 모든 정보를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 프로 방영에 대한 파장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갖게 되었다.
이 방송사건은 이곳 동포사회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고 동포공동체는 순식간에 무너질 위험에 처했음을 느끼고 단독으로 문제의 S TV 방송국에 이의를 제기하며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었지만
담당
PD는 논리적인 대답과 변명으로 일관했고 계속적인 사건 정황과 잘못된 취재의 문제점을 계속 추궁하자 나중에는 웹사이트 담당자가 나의 글을 올리자마자 지워버리는 웃지 못할 상황으로까지 되었다.
결국 방송위원회에 인터넷을 통해 제소를 하였지만 방송위원회에서도 특별한 조치를 취하거나 답변조차 없었다.

동포들의 분노는 범 동포적인 참여로 동포 20여개의 단체장들의 집단서명으로 항의 성명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문제의 방송은 노 코멘트였다.
웹사이트에서 단독으로 수많은 네티즌에게 설명을 해 보려했지만 문제의 TV 방송의 방해로 어려움을 겪었다.
문제의 방송된 비디오가 동포사회에 공개되자 비디오를 시청한 한인들 중 그 사실을 반신반의하는 동포들도 생겨 상당한 혼란이 생기는 상황이 되자
이 몫은 우리 한인방송이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방송을 통해 사건에 대한 동포들의 바른 이해를 구하고 동포사회를 무너트리려는 조직을 폭로하게 되었다
.

그로 인해 방송국을 폭파하겠다는 협박과 살해위협까지 받게 되었고 한인회와 대사관의 특별요청으로 경찰의 신변보호까지 받아야 하는 입장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방송은 동포사회에서 악이 존재해서는 안된다며 하나님께서 악을 반드시 무너뜨릴 것이라는 계속적인 악과의 전쟁을 선포하자 폭력조직 한사람이 직접 찾아와 최후 협박을 하는 자리에서 나도 정면승부를 걸었다.



♥ MILA 선교센타 겸 방송건물!!


그들이 우리를 협박했던 전화 녹음과 지금 대화내용도 이미 녹음이 되었으며 그리고 이러한 자료가 이미 관계기관에 보관이 되어있어
그들이 어떠한 행동도 통하지 않을 것임을 경고하고 더 이상 동포사회에서 저지르고 있는 모든 행위를 중단하고 빨리 파라과이를 떠날 것을 촉구했다
.

한 달 뒤 월드컵이 끝난 후 이 폭력조직을 뒤에서 움직이며 이권을 챙기던 핵심인물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그 뒤 조직원들은 대부분 흩어져 파라과이를 떠나게 되었고 현재는 조용한 분위기로 회복되었다.
동포들은 이제야 방송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 같았다. 수고했다는 인사전화를 계속 보내왔다. 폭풍우 속에서 활동했던 방송의 기능은 상당한 위력을 보였지만 역시 방송인은 여전히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눈과 귀를 크게 열어야 하는 계속적인 도전을 해야 했다.

나에게 낙이라고 할까 힘이 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매년 KBS가 주관하는 세계 한국어 방송인 대회이다.
방송시작부터 초청을 받고 계속참여를 하게 되었는데 그 방송대회에 참여하면서 방송의 중요성과 책임에 대한 마음의 다짐이 더욱 확고해지기 시작하였고 자신감이 생겼다.
2002
3월에 한 달 동안의 수원연수원의 연수기회도 갖게 되었고 10월 방송인 대회시 서울프라이즈 시상식에 첫 출품한 작품의 입상과 2012년 대상을 수상하는 등 방송이 갈수록 질적 향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사고가 터졌다. 2002년 방송인 대회 참여 차 서울에 도착한 다음날 아들이 보내온 이 메일을 통해서 방송국에 전기누전으로 화재가 발생 한 것이었다.
방송실 내부가 전소하고 송신기까지 태워버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소식이었지만 전화위복이라는 말을 생각하며 한 달간의 한국의 일정을 묵묵히 보내야 했다.

kbs에서는 대회 참여 중 일어난 일이라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아침마당등에 출연시키는 등 성의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태워버린 장비와 시설을 되돌려 받을 수는 없었다.
700
만 해외동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국가기관이나 어떠한 단체에서도 방송과 현지 동포들과의 관계성에 대해서는 아직은 적절히 연결 짓지 못하는 형식적인 정책을 일관하는 느낌을 받고 있다.
지구 반대편 남미대륙의 유일한 한인방송의 어려움을 몇 몇 군데 하소연도 해 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나는 화재이후 현지로 돌아와 이제는 포기하겠지하는 주변의 기대를 또 무너뜨리고 1년여의 방송 복구 작업을 위해 비지땀을 흘렸다.
이미 스튜디오를 전보다 훨씬 훌륭하게 복구했으며 송신기도 웹사이트를 통해 한국의 모 송신기회사에서 전보다 높은 1KW출력의 송신기를 기증하여 항공편으로 보내왔다. 그리고 200311월 또다시 힘든 여정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면서 방송사역을 재개하였다.

그리고 2010년 방송이 또다시 중단이 되었다. 2007년 한국 방송통신 위원회의 장비지원을 받기위한 절차에서 대사관이 개입되면서 방송 언론 길들이기를 시도한 당시 주 파라과이 대사관 김모 대사의 방해공작의 여파로 결국 방송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깨닫고 있는 것은 그러한 일들까지도 하나님의 계획가운데 진행되고 있는 일이라고 믿기에 지금도 방송재개를 위한 노력과 기도를 하고 있다.
그동안의 아나로그 방송시대에서 디지털 방송시대로 넘어가야 할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하시는 주님이 계시고, 21년째 매주 화요일 기도 모임으로 모여 묵상을 나누며 중보기도하고 있는 사랑하는 동료 MILA 선교사님들과 우리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 파라과이 기독교 한인방송 대표
♬ 선교사 김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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