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현금화폐 최고액권인 5만원권을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최근 국제금융시장을 주도하는 미국과 유럽에서 테러, 탈세, 뇌물 등 범죄와 부패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고액권 폐지론’이 급부상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5만원권이 시중에 돌지 않고 잠기면서 발생하는 폐해가 적지 않은 데다
세계 각국이 올 9월 중국에서 열리는 G20에서 고액권 폐지를 논의할 것으로 보여 5만원권의 운명도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15일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유럽의회 공개연설에서 “500유로권이 범죄 목적으로 쓰인다는 국제적 비난 여론이 커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 발언을 놓고 유로화 발행권한이 있는 ECB가 이미 500유로 폐지방침을 정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2002년 도입된 500유로는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70만원 정도 화폐가치가 있다. 단일화폐로는 1000스위스프랑(약 120만원) 다음으로 최고액권이다.
500유로는 테러·범죄단체가 자주 활용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앞서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재무장관들이 테러리스트 자금활용을 차단하는 차원에서 500유로를 없애는 방안을 요청하기도 했다.
미국도 최고액권인 100달러(약 12만원) 폐지론이 급부상하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 실세인 저명 경제학자 로런스 서머스 하버스대 교수는
지난 16일 워싱턴포스트 온라인블로그에 ‘100달러짜리 지폐를 없애야 할 시점’(It’s time to kill $100 bill)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서머스 교수는
이 글에서 고액권이 부패와 범죄를 조장할 수 있고 결제기술 발전으로 합법적 거래에서는 활용도가 떨어진다는 점을 근거로 100달러 폐지론을 주장했다.
그는 특히 미국과 유럽뿐만 아니라 G20(주요 20개국) 지도자들이 공조해 각국 고액권을 없애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에 따라 오는 9월 중국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에서 어떤 결론을 낼지 주목된다.
다만 이미 시중에 풀린 고액권이 상당한 데다 각국 현금결제 수요가 줄지 않고 있어 폐지론은 시기상조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도 유럽, 미국 등과 비슷한 이유로 5만원권을 발행한 직후부터 폐지론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정치권 불법 선거자금, 고소득 자영업자의 탈세 등 각종 사건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5만원권 돈다발이다.
2009년 5월부터 발행된 5만원권이 지하경제에 광범위하게 흘러들어갔다는 의혹은 환수율을 통해 추정이 가능하다. 발행 첫해 7.3%던 5만원권 환수율은
2010년 41.4%, 2011년 59.7%, 2012년 61.7%로 상승하다가 2013년 48.6%, 2014년 29.7%로 급락했다. 지난해 환수율도 40%에 머물렀다.
5만원권은 2009년 이후 총 112조5000억원이 방출됐고 48조2000억원이 회수됐다. 누적환수율은 43% 정도다.
시중에 5만원권 10장이 풀리면 6장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같은 기간 1만원권 환수율이 90%가 넘는 것과 비교된다.
한국은행은 5만원권과 지하경제의 연관성에 대해 공식적으로 부인한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 국정감사에서 “경제규모 확대와 저금리 장기화로 고액권 위주로 현금보유성향이 늘어났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5만원권이 지하경제를 조장한다는 지적에는 견해를 달리하며 오히려 “5만원권이 좀 더 일찍 발행됐어야 했다”고 강조했다.
한은 고위 관계자는 “500유로는 화폐가치가 5만원권의 10배가 넘기 때문에 직접 비교대상으로 보기 어렵다”며
“국내 경제규모를 고려하면 5만원권이 최고액권으로 적정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한은이 5만원권과 10만원권 동시 발행을 검토했다가 고액권의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자 10만원권 발행계획을 철회했는데 5만원권까지 안 찍을 수는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한은의 입장과 달리 5만원권을 폐지하거나 최소한 발행연도를 표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게 설득력을 확보하고 있다.
정부가 2013년 소득세법을 개정해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금액을 4000만원에서 2000만원으로 절반으로 낮춘 데 따른 변화를 반영해야 한다는 것.
즉 소득노출을 꺼리는 자산가들이 은행계좌에 있던 금융자산을 대거 5만원권으로 현금화했고 이 때문에 시중에 제대로 돌지 않으므로 원점에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