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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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2008.07.23 00:52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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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설교-로마서3장 1~8절

교회 안에도 매사에 따져들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 그 자체를 그냥 단순하게 깨닫고 믿으려 하지는 않고, 어찌하든지 기독교 교리의 논리, 신자 생활에 관한 원리, 혹은 교회의 운영 방침 등에 대하여 꼬치꼬치 시빗거리를 찾아서 비판하는 데에만 자신의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 쏟고 사는 교인들이 간혹 있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은 초대교회 당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 믿는 교인이 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유대주의를 주장하고 율법과 할례를 강조하며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는 뒷전으로 밀어 놓으면서 매사에 따져들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들을 응대하여 변증하는 장면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처럼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잘 캐어묻는 대표적인 질문들을 여기에 설정해 놓고, 그에 대한 명쾌한 대답을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소위 기독교인이라 하면서도 오히려 성경의 진리에 대하여 따져들기를 즐겨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응대하시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신실하신 말씀이 모든 불신스러운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로마서 3장 1절과 2절에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바울은 앞서 로마서 2장 17절 이하 29절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유대인들이 율법 준수와 할례 받은 것을 두고 자랑하는 것을 공박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유대인의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면, 도대체 유대인의 나은 것, 즉 우월한 것이 무엇이 되겠느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1절에서 그처럼 유대인들 쪽에서 나올 수 있는 질문을 스스로 가상적으로 설정해 놓고 2절에서 대답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의 나은 것’들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맺은 백성됨, 메시아 가문을 소유함, 제사장 나라가 된 것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첫째는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그 어느 민족보다도 하나님 말씀에 제일 먼저 접근할 기회, 그것을 믿고 그대로 행하며, 그것을 남에게 전해 주는 특권과 책임을 맡았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3절과 4절에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에서도 사도 바울은 두 번째 가상적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라는 말은,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받은 유대인들 중에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있는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냐?’라는 질문이 또 유대인 쪽에서 나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까 첫째 질문보다 좀더 시비조가 섞인 질문이 됩니다.

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즉각적인 대답은 「어찌하리요」, 즉 ‘그게 어쨌다는 말이냐?’는 반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라고,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 중 일부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없어지겠느냐?’라는 말로 되받아쳤습니다.

그리고는 계속 말하기를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말 번역에서도 그 어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듯이, 아주 강력한 부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하나님의 미쁘심이 폐하여진다는 것은 도무지 성립될 수가 없는 말이다.’라는 뜻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존재의 신빙성이, 사람이 그 하나님의 존재를 믿어 주거나 안 믿어 주거나 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믿든지 안 믿든지,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유대인들이 다 믿든지 아니면 그 중에 어떤 자들은 불신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무조건 신실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어도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무엇이 어찌되었든지 간에 하나님은 항상 참되실 수밖에 없고 분명히 참되신 분이다.’

- 바로 이것만이 절대적 가정인 동시에 절대적 사실이며, 절대적 전제인 동시에 절대적 명제라고 사도 바울은 단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절대 명제를 바울은 시편 51편 4절 곧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말씀에 대하여 항상 의롭다고 인정받으시는 분,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항상 옳으신 말씀만 하실 수밖에 없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말씀이 혹 사람의 논리로 볼 때 성이 차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해도, 하나님 하신 말씀이 틀린다는 것 자체부터가 아예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논리입니다.

계속 인용된 말씀, 「(주께서)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고 번역된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법정에서 항상 승소하시는 분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쟁에서 어떤 경우에도 결코 이길 수 없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판단 받으실 때마다 항상 이기시는 분, 절대로 지지 않으시는, 질 수 없는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참 얼마나 멋있는 대답입니까? 사람이 하나님과 어떤 논쟁을 벌이려 하는 때에,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자기가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을만한 어떤 대답을 얻고자 할 때에, 사도 바울은 그런 논쟁의 자세부터가 근본적으로 틀려먹은 것이라고 못을 박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는 말씀에 대하여 항상 옳으시고, 하나님은 사람과의 논쟁의 법정에서 항상 이기시는 것이 당연하신 분이다. 그러니 아예 그런 질문을 시작하는 자체부터가 잘못된 것이다.’라는 논리인 것입니다. 얼마나 시원하고 명쾌한 대답입니까?

예로부터 사람은 항상 하나님께 불신의 질문을 해왔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이유, 하나님을 믿지 못할 이유에 대하여 제 딴에는 여러 가지 논리를 동원하여 따지고 들면서 자신의 불신을 합리화하려고 해왔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반드시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한다면, 옛날에 예수 믿을 기회도 없었던 우리 조상들은 불공평한 것 아니냐?”라는 따위의 질문입니다. “과학이 발달되면서 점점 더 신의 존재라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되어지고 있는데, 왜 여전히 옛날 사람들이 믿던 식으로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현대인들에게 억지로 강요하느냐?”라는 식으로 반발의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까다롭게 따져들려는 질문에 대한 성경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우선 성경은 그런 질문에 대하여 꼬치꼬치 대답하고 설명해 주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게 어쨌다는 말이냐? 네가 그런 불신앙적인 질문으로 공격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조금이라도 타격을 입을 것 같으냐?”라고, 아주 강력하게 맞받아칩니다. “네가 성경 말씀을 의심하고 이것저것 따져든다고 해서 그 의로우신 말씀에서 단 한 마디라도 무슨 모순된 것이나 오류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으냐? 어림도 없는 소리다.”라고, 꽉 눌러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말씀의 옳으심’이야말로 사람의 모든 논리와 사색을 뛰어 넘는 최고최대의 대전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참되시다.’라는 사실과 ‘그 하나님의 말씀은 다 틀림없는 진리이다.’라는 사실이, 우리의 신앙 문제에 대한 그 어떤 토론이나 연구의 자리에서도 요지부동의 절대적 제1명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이 세상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많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사실 자체가 위협을 받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성경 못 믿겠다고 가지가지 이론을 들먹이는 자들이 많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성경 말씀의 무오성이 조금이라도 흔들리지는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되심’이야말로 절대적인 사실이며 ‘그 말씀의 신실하심’이야말로 절대적인 진리임을 믿음으로써, 세상의 그 어떤 불신앙적으로 따져드는 질문에도 결코 미혹되지 아니하고 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리를 굳게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자신의 불의한 행위를 합리화시키려는 모든 자들에 대한 응답입니다.

로마서 3장 5절과 6절에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불신자들이 흔히 할 수 있는 세 번째 가상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이것은 그 따지고 드는 강도가 훨씬 더 나아간 질문입니다.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라는 말은 ‘내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식으로 말해 보겠는데’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의 말은 ‘하지만 우리가 불의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더욱 돋보인다면, 그것은 또 무슨 말이냐?’라는 뜻인데, 바로 불신자들 중에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자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절대적 의로우심과 인간의 절대적 타락을 강조하니까, ‘그렇다면 나 같은 인간의 불의한 것 때문에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 더욱 돋보인다는 뜻이냐?’라고 아주 불만스럽게 따지고 드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불의한 것도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 불의한 것이 뭐가 잘못이 되겠느냐?’라는 말로서, 조금 전에 나왔던 질문, ‘선택받고 특권 받았다는 민족 중에서 불신자가 있다면 모순 아니냐?’라는 질문보다 훨씬 더 지독한 시비조의 질문인 것입니다.

그처럼 건방진 자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그래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는 말이냐?’라고 응수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강력하게 선포하기를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라고, ‘그런 말은 도무지 말이 될 수 없다.’라고 아주 단호하게 잘라 말했습니다. 이것은 아까 4절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고 했던 말보다 더욱 강력한 부정형의 표현입니다.

그러면서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은 결코 불의한 존재이실 수가 없다.’라는 사실, ‘사람의 논리가 어떤 식으로 따져 나오든지 간에, 불신자가 보기에는 기독교 교리에 무슨 큰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든지 간에, 하나님에게는 그 어떤 형태의 잘못도 있을 수 없다.’라는 사실은, 도무지 건드릴 수 없는 절대적인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 이유가 바로 ‘하나님은 심판주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궁극적인 심판주이심을 먼저 확실히 믿으면, 그 분은 무엇이 어찌 되었든지 간에 항상 의로우실 수밖에 없다는 것 역시 무슨 증명이 따로 필요 없는 아주 자연스러운 추론이 된다는 뜻입니다. 참 멋있는 논리가 아닙니까? ‘이러이러하니 하나님이 불의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하여서도, 사도 바울은 그 질문 자체의 ‘이러이러한 논리’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반박하며 토론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은 심판주이시니 무조건 그 어떤 경우에도 불의할 수가 없다.’라는 절대 전제를 가지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볼 때에는 비논리적인 대답일지 모르지만, 신앙의 마음으로 판단할 때에는 이보다 더 확실하고 시원명쾌한 대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그처럼 자신의 불의를 합리화시켜려는 질문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갈수록 더 지독해지는 질문을 또 하나 인용하고 있습니다. 7절과 8절에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네 번째 가상적 질문은 그야말로 시비의 극치라고 할만 합니다.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이란, ‘나의 거짓으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욱 분명히 드러나고 그 결과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처럼 내가 악해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났다면 나도 하나님한테 좋은 일 해 준 사람이 아니냐? 그렇다면 그처럼 큰 공이 있는 내가 왜 죄인으로 취급받고 벌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냐?’라는 뜻이 됩니다. 정말 교묘하고도 끈질기기 짝이 없이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자세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제 어떻게 응답합니까? 우선 8절 제일 앞에 나오는 「또는」이라는 말은 빼고, 나머지 말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는 부분만 생각하면 됩니다. 다시 말해서, 불신자들이 7절에 있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결국에는 ‘내가 악을 행하면 행할수록 더 좋은 것이 아니냐?’라는 논리로 비약되는 것이라고 바울이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따위 논리가 어디 말이나 될 말이냐?’라고 사도 바울은 강력하게 반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처럼 따지고 드는 자들이 오히려 사도 바울을 향하여 한다는 말이 곧 ‘우리가 그런 논리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주장하는 교리가 바로 그런 논리로 말하는 것이다.’라고 비방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완전히 주객전도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더 이상 이들에게 대꾸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냥 「저희가 정죄를 받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선언하고 끝내는 것입니다. 자신의 불의한 행위를 끝까지 정당화하려고 오히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공박하고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 진리를 쪼개려 하는 자들은, 더 이상 대화의 가치조차 없는, 그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저주받은 무리라는 말입니다.

오늘날에 와서 특히 이처럼 자기의 불의한 행위를 합리화하려는 자들이 아주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이들의 구호는 ‘나를 있는 그대로, 생긴 그대로 받아 달라.’는 것입니다. 동성연애를 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것을 나쁘다고 말하지 말고 그냥 원래부터 그런 사람으로 사회에서 인정해 달라고 합니다. 이슬람 종교나 기독교 종교나 다 서로 존중해 주어야지, 기독교만이 옳은 종교라고 주장하는 것은 독선이라고 비난을 퍼붓습니다. 북한 공산주의 정권에 대해서도 그 어떤 비판도 하지 않으려 하고, 그냥 같은 민족으로만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논리가 엄청나게 힘을 얻고 있는 시대인 것입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더 이상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분하려 하지 않습니다. 악한 행위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큰소리치며 정당화하려 합니다. 의로운 행위와 불의한 행위를 구별하려고 하는 그것이 오히려 나쁜 일이라고 매도하는, 실로 지독함의 극치에 이른 말들이 마치 진리인양 진짜 정의인양 그 소리를 끝없이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자들과는 아예 상대할 가치조차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복음의 진리를 비비꼬는 자들, 목사의 설교를 따져드는 자들, ‘하나님 하시는 일이니 항상 의롭다.’라는 이 선포를 전혀 수긍하지 않고 끝까지 따져 들면서, 결국에는 자신의 악한 행위를 정당화시키려 하는 이런 자들에게는 더 이상 설명도 논리도 대답조차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는 이 말씀대로, 그저 심판 받아 마땅한 자들일 뿐입니다.

결국에는 선과 악을 공의롭게 판결하신 하나님의 최후심판이 그 모든 불의한 행위와 악한 논리를 잠재우고 말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야말로 끝없이 따져 들려고만 하는 자들을 완전히 끝내어 버릴, 하나님의 최종 논리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최종 판결의 행위가 될 것입니다. 세상의 불신자들이 자신의 악하고 불의한 행위에 대하여 그 어떤 이유를 둘러대고 논리적으로 정당화시키려 해도,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그 모든 악행에 완벽한 마침표를 찍고야 마실 것을 깨달음으로써, 그 심판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롭고 선한 생활을 끝까지 의연하게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해야 할 말을 순교적 각오로 용기 있게 증거하지는 않고, 오히려 기독교의 복음과 윤리에 대하여 정면 도전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사람이 죄인이다’라는 말에 대하여 반사적으로 따지고 ‘죄인은 심판 받는다’는 말에는 더욱 열을 내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을 결코 ‘입바른 소리하는 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을 감동시킨 성령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무슨 논리적인 설명으로 대답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게 어쨌다는 말이냐? 결코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조건 참되시고 하나님은 항상 의로우시기 때문이다. 만일 여기에 도전하는 자가 있다면 그런 사람은 정죄받아 마땅한 인간이 될 뿐이다.”라고, 아주 원색적이고도 단순하면서도 분명한 대답으로 응수합니다. ‘오직 하나님은… 이럴 수밖에 없는 존재이시다.’라는 대명제 하나로 모든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이 판정을 내렸는 데도 불복하면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당하게 됩니다. 법정에서 소란을 피우면 죄벌이 오히려 가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에 시비를 걸고 하나님의 판결에 대어드는 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정죄와 심판은 얼마나 무거운 것이 되어야 마땅하겠습니까?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시지 사람이 하나님을 판단하는 위치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3장 8절에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자신의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의문을 가장 분별력 높은 것으로 여기거나, 자기 지식에서 나오는 논리를 가장 지혜로운 것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들은 사실에 있어서는 진리를 위하는 자세가 아니라 오로지 진리를 거스려 행하는, 진리의 하나님을 도전하는 일일 뿐인 것입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 우리는 항상 이렇게만 생각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다 하나님께 대어들고 비판하고 하나님을 판단하려 들어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 법정에서 질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 신자들은 오직 이렇게 깨닫고 이렇게만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은 다 죄인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심판주이시며 유일한 구원주이시다’ - 우리는 이렇게 믿어야만 하고 이렇게만 믿으면 충분한 것입니다.

사람이 어찌 되었든지 간에, 사람이 무슨 불신의 질문을 하고 무슨 말로 자신의 불의한 행위를 정당화하려 해도 오직 ‘하나님만 참되시고 하나님만 항상 의로우시다’라는, 이 가장 명료하면서도 정확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절대적 진리와 절대적 사실을 항상 아멘으로 믿고 고백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사게재일: [2004-10-12 오전 12: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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