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고난

12월 22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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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고난

   

2008.07.23 00:39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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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규 목사(인천순복음교회)
성경:마가복음 15:21-27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고난 , 네 번째입니다.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2002년 사순절 기간에 예수님의 고난을 주일마다 계속해서 우리가 같이 생각하고 같이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 삶의 흔적이 남습니다. 어른들은 그 사람의 얼굴과 손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사람의 손과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40살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사람은 40살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연 나는, 여러분은 지금 어떤 삶의 흔적들을 각자 자기 얼굴과 자기 손에 가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러분 얼굴에, 여러분 손에 어떤 흔적이 있는지.
우리의 어머니들을 보면, 어김없이 자녀 사랑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굳은살이 박힌 발, 트고 갈라진 손, 껄껄한 손, 또 약간 휜 허리, 깊게 골패인 주름살, 하얗게 새어 가는 흰머리, 그뿐이 아닙니다. 자녀를 볼 때마다 미소짓는, 피어나는 사랑의 얼굴들, 미소들입니다.
누구든지 그런 어머니를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런 어머니 앞에 존경심이 생기는 겁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향한 사랑의 흔적이 있습니다. 성경에 말합니다. 이사야서 49장 15절로 16절 상반절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 그랬습니다.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 이렇게 말합니다. 손에 새긴 것도 모자라서 십자가 위에서 몸 전체에 사랑의 흔적을 남기셨습니다.
혹시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스러우면 십자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매맞으신 예수님, 가시관 쓰신 예수님,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신 예수님, 십자가 위에 높이 달려 계신 예수님을 본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님의 사랑을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증거가 뭐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0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시고 죽으신 그 모습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증거란 겁니다.
사순절 기간입니다. 특별히 오늘 또, 이 시간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큰사랑을 베푸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흔적을 내 몸에도 새기고, 그 예수님께 더 많이 감사하고, 그 은혜를 우리는 이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이 사순절 기간에, 예수님이 고난 당하신 기간에, 우리의 신앙이 다시 회복되고, 다시 찾아지고, 다시 사는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가시관 쓰신 예수님

첫째로, 가시관 쓰신 예수님 , 가시관 쓰신 예수님. 여러분, 찔려보셨어요? 찔리니까 아파요? 안 아파요? 안 찔려봤어요? 바느질하다가 손끝 안 찔려봤어요? 일하다가 가시에 안 찔려봤어요? 찔리면 엄마, 아파요. 그런데 예수님이 찔리신 가시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적어도 한 5cm, 7cm, 10cm 되는 긴 가시, 얼마나 예리한지 몰라요. 그것으로, 가시로 관을 만들었어요. 그것을 머리에 얹어만 놓아도 아플 것인데, 확 박았습니다. 생살이, 이마가, 머리가 찢깁니다. 피가 막 흐릅니다.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저주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가시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가시는 저주를 상징합니다. 창세기 3장 17절로 18절 상반절을 보니까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에 에덴 동산에는 이 말씀을 본다면 가시가 없어요. 가시와 엉겅퀴가 없다는 거예요.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기 때문에 죄 값으로 가시와 엉겅퀴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시는 죄의 상징인 것입니다.
가시 면류관은 범죄한 인간이 써야 할 죄의 대가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가시 면류관을 쓰셔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허물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왜 주님이 죄를 짓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가시 면류관을 쓰셨느냐? 내가 져야 할 가시 면류관을, 여러분이 져야 할 가시 면류관을 우리 예수님이 대신 지신 것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에서 수많은 영광의 면류관을 쓰고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 19장 12절 상반절에 보니까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그랬습니다. 피조물 된 인간은 만왕의 왕에게 황금 면류관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은 황금 면류관이 아니라, 날카로운 가시관을 예수님께 씌워드렸습니다. 씌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내가 써야 할 가시관을, 여러분이 써야 할 가시관을 예수님이 쓰셨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의의 면류관이, 의의 면류관이 주어지는 겁니다. 가시관을 써야 할 내가, 예수님이 대신 가시관을 쓰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오히려 이제 가시관은 벗어지고 의의 면류관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엄청 큰 축복 아닙니까? 디모데후서 4장 8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 그러므로 사도 바울만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주님을 기다린 모든 자에게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의의 면류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요, 예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구할 것은 뭐냐? 세상의 금 면류관이 아닙니다. 영광과 존귀와 찬양의 면류관을 우리를 위해서 가시관 쓰신 예수님께 드리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예수님께 영광의 면류관을 받으시옵소서. 존귀를 받으시옵소서. 찬양을 받으시옵소서. 우리 주님이 나를 위하여 가시관 쓰셨사오니, 이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모든 것을 주께 드립니다. 찬양을 받으시고, 존귀를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하며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우리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하늘의 면류관을 또 구하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내 자녀, 내 가족, 내 친척, 내 친구, 내 이웃들을 우리가 전도하고, 양육하고, 제자를 삼고, 제자로 살면,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주신다고 말씀하십니까? 영광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5장 2절로 4절에 보니까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열심히 전도하고, 열심히 양육하고, 열심히 성도를 돌아보고, 열심히 예수를 자랑함으로 말미암아, 천국 가서 영광의 면류관을 얻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온갖 시험과 환난 중에도 충성함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면류관을 또 우리가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보니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신 예수님

두 번째입니다.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신 예수님. 예수님은 양손과 양발에 큰 대못이 박히셨습니다.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인간의 손과 발로 지은 모든 죄들을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내가 지은 죄, 여러분이 지은 죄, 손으로 지은 죄 때문에, 발로 지은 죄 때문에 우리 예수님이 큰 대못에 손과 발이 박히셨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5장 27절에 보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예수님에게 가해진 것입니다. 당시 사용된 못은 길이가 약 13㎝부터 18㎝입니다. 한 뼘이에요. 그 굵기가 얼마나 굵으냐? 1㎝ 내지 1.5㎝, 그러니까 보통 장정의 검지 손가락, 아니면 엄지손가락 정도예요. 지금처럼 못이 기계로 빠져나와 아주 매끈한 못이 아닙니다. 그리고 쇠도 망치로 두드려서 만드는 못, 꺼끌꺼끌한 길이가 13㎝부터 18㎝까지, 굵기가 1㎝ 내지 1.5㎝, 이 무지막지한 쇠못이 예수님의 손, 발에 박힙니다.
못을 박은 자리는 우리는 흔히 그냥 손으로 알지만, 실제로는 손목인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손목은 팔이 아닌 손의 일부로 취급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거대한 쇠 대못이 손목과 발등에 박힙니다. 이제 뼈가 막 으스러집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정맥과 온갖 신경계를 또 다 뚫고 지나갑니다. 힘줄이 끊어집니다. 살이 찢어집니다. 그 고통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제 벌어진 양팔과 탈골된 어깨 때문에 극도의 호흡장애가 옵니다. 숨을 쉬려고 움직이면 발목뼈는, 그 손뼈는 으스러지는 고통이 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움직일 때마다 매를 맞아서 찢긴 그 등의 살이 십자가 기둥에 긁히면서 얼마나 아픈지 몰라요.
이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예수님은 군인들이 무릎을 꺾기도 전에 죽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치료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보다 더 큰사랑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 부모님의 사랑이 커도 예수님의 사랑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가족과 친구로 대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13절에 보니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을 그 전에 많이 받았으니, 우리도 누구처럼? 사도 바울처럼 이 사랑의 흔적을 내 몸에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바울이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7절입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
내가 그 모든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주는 겁니다. 내가 그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그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에 못을 박았다고 상대편 마음에 대못을 박는 것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시편 109편 4절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나 너는 나를 대적하니 나는 너를 위해 기도하노라
예수의 흔적은 이웃을 위한 희생과 헌신의 흔적인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희생하고, 이웃을 위해서 헌신할 때, 이것이 예수님을 위한 흔적인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교회가 생활보호대상자, 독거노인을 돕는 것, 시간을 드리고, 몸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아까워하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이 예수님의 그 사랑을 나타내는 흔적인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흔적은 또 그 뿐이 아닙니다. 영혼구원을 위해 고난을 당한 흔적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로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영이 죽었던 우리들의 영혼을 살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 받게 하기 위해서 그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흔적을 위해서는 이 복음을 나가 전할 때, 핍박받을 때가 있습니다. 조롱받을 때가 있습니다. 업신여김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럴지라도,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는 그것이 예수의 흔적을 남기는 길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예수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다가 때로는 물벼락도 맞고, 때로는 불벼락도 맞고, 많은 고통과 죽음도 당했지만, 굴하지 아니하고 그 길을 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그렇게 고난 당하신 것에 비교하면,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가 물벼락 맞는다, 욕을 먹는다,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에 비하면, 그 고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견디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우리 모두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때로는 그것이 영광 밖의 그 길이라도, 혹시 배고픈 그 길이라도, 멸시, 천대받는 그 길이라도,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성령님을 모시고 기쁨으로 좇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제자가 됩시다.

셋째, 옆구리를 창에 찔리신 예수님

세 번째입니다. 옆구리를 창에 찔리신 예수님. 예수님은 가시관만 쓰신 것이 아닙니다. 양손과 양발에 대못만 박히신 것이 아닙니다. 옆구리에 창을 찔리셨습니다.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은 후에도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로마 군인의 창에 찔려 피와 물을 다 쏟으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9장 3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
학자들은 말합니다. 이 물과 피는 가슴 주변과 심장이 터져서 나온 것으로 본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심장이 터질 정도로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고통이 얼마나 크신 지, 이렇게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시편 22편 14절로 15절입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 예수님이 얼마나 고통스러우셨는지를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 모든 고난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9장 36절에서 3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죽는 순간과 죽은 후에도 말씀대로 사신 것입니다. 말씀을 이루어드린 것입니다. 고통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결코 그렇게 하지를 않으셨습니다.
과연 나는, 과연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예수님의 고난 때문에 구원받은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한번 생각해 봐야 될 것입니다. `조금만 물질이나 내 형편이 어려우면, 헌금부터 줄이려 하지는 않는가? 언제나 교회 일보다 내 일이 우선하지는 않는가?` 제가 이번에 국가 조찬기도회에서 신앙심을 회복하자 그러면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나 먼저, 그 다음 하나님`,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그랬어요. 건강한 신앙은 어떤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하나님 먼저, 너 먼저, 그리고 나 인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열심히 예배 드려야 됩니다. 그런데 기도와 예배만이 신앙이 아닙니다. 그의 삶의 순서가 하나님 먼저, 너 먼저, 그리고 나 할 때, 그 신앙은 건강한 신앙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신앙만이 건강이 아닙니다. 교회 밖에서의 신앙이 생활로 나타날 때, 그 신앙이 건강한 것입니다. 한번 따라해 보세요. 하나님 먼저, 너 먼저, 그리고 나. 그렇습니다. 우리 삶의 순서가 있습니다. 하나님 먼저, 너 먼저, 그리고 나. 그런 삶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텔레비전 볼 시간은 있어도 구역예배 드릴 시간은 없다고 말하지 않는 것.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주셨습니다. 고통을 통하여 온 몸에 사랑의 흔적을 예수님이 남기셨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이 그 자녀에게 축복하시겠다고, 복 주시겠다고 약속까지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대로 삽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몸 드리고, 시간 드리고, 물질 드리고, 헌신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말씀대로 살면, 부활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고난이 없이 부활은 없습니다. 말씀대로 행함이 없이 하나님의 축복은 없습니다. 구원은 공짜, 축복은 심은 대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결론입니다. 사랑은 무엇이냐? 상대를 위한 희생입니다. 사랑은 뭐냐고요? 상대를 위한 희생, 희생. 희생이 사랑입니다. 또 사랑은 무엇이냐? 사랑은 노는 게 아니라, 사랑은 일하는 거다. 왜? 상대를 기쁘게 해주려니까, 상대를 즐겁게 해주려니까, 상대를 풍요롭게 해주려니까, 상대에게 모든 걸 베풀어주려고 하니까, 사랑은 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십니다. 예레미야서 33장 2절과 3절에 말씀하십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지으실 때만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일하십니다. 왜요?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그렇습니다. 사랑 많으신 부모님들은 연세가 많으셔도 또 움직이십니다.
자식을 사랑하시는 부모님은 활동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활동하시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치매도 안 걸릴 거예요. 우리 하나님이 치매 걸리셨어요? 안 걸리셨어요. 왜요? 하나님이 자녀를 사랑하시니까.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사랑하시니까 지금도 일하십니다. 일하십니다. 아멘입니까? 그러므로 사랑은 뭐냐고요? 상대방을 위해서 희생하는 겁니다. 사랑은 뭐냐고요? 일하는 겁니다. 따라합시다. 사랑은 노는 게 아니고 일하는 거다. 여러분, 그저 사랑한다고 둘이 방에 앉아 가지고 여행이나 다니고, 놀러만 다니고, 그건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사랑하는 게 무엇입니까? 자기 처자를 풍요롭게 잘 살기 위해서 애쓰고, 수고하고, 땀흘리고, 일하는 것, 이게 사랑입니다. 아멘. 따라합시다. 사랑은 수고하는 거다 , 사랑은 일하는 거다 , 사랑은 상대를 위해서 희생하는 거다 , 이게 사랑이에요. 이거 없는 사랑은 다 가짜, 가짜, 가짜. 삼류소설에 나오는 사랑은 다 가짜입니다. 삼류만화에 나오는 사랑은 다 가짜. 왜요? 그 사랑에는 일이 없으니까. 희생이 없으니까. 주는 게 없으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사 독생자를 주셨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사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고난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만하지 말자고요. 말만하지 말자고요.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기도하고, 성령세례 받고, 성령충만함 받아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말씀을 전하고 살아가는 겁니다. 말씀을 지키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럴 때, 그것이 산 믿음이요, 건강한 신앙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목사님 요새 은혜가 안 되요. 은혜가 없어요. 왜 그래요? 받기만 하려고 하니까 은혜가 없지요. 예수님처럼 주려고 해봐요.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그 매맞음, 예수님의 가시관에 찔림, 예수님의 손발에 못 박히는 그 아픔, 예수님이 옆구리에 창을 찔려 물과 피를 쏟으시는 것, 그것을 우리가 생각한다면 우리의 신앙이 메마를 수가 없어요. 은혜가 안 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아무것도 못 받았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그 고난만 생각해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야죠. 어떻게 나태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나태할 수가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2002년 사순절 기간에 계속해서 주일날마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설교를 해요. 기억하고 감사하는 우리가 됩시다. 이번 사순절 기간에 잃어버린 신앙이 회복되고, 다시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하는, 감사하고 감격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틀림없이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기사게재일: [2003-04-16 오전 9: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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