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
최낙중 목사(관악교회)
성경:마가복음 15:20-27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그 위에 있는 죄 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막 15:20∼27>
저는 작년 여름에 중고등학생, 그리고 대학생 50여명과 함께 이스라엘 나라를 갔습니다.
성서고고학 협회에서 청소년 유대광야캠프를 실시하는데 저를 주강사로 초청했기 때문에 함께 가서, 비아 돌로로사, 즉 그 말은 슬픔의 길이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그 길에 가서 먼저 저는 청소년들을 앞에 놓고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서 설교한 후 학생들 여러 명에게 번갈아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올라가도록 했습니다.
그때에 찬송을 함께 불렀는데,
왠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왠일인가. 왠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주 십자가 못박힐 때 그 해도 빛 잃고 그 밝은 빛 가리워서 캄캄케 되었네.
이 찬송을 부르는데 학생들이 흐느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앞선 학생 뒤를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서 간증을 하는데 어느 한 대학생이 나와서 펑펑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고 20m밖에 걷지 못했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십자가를 마땅히 져야 하지만 죄 없는 예수님이 이 십자가 지신 것을 생각하니까 내가 지금까지 신앙생활 한 것을 돌이켜보니 너무 잘못했구나, 죄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내 죄를 없애 주기 위한 대속의 십자가였다는 생각을 하니까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하면서 울었습니다.
눈물은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누가 울면 함께 울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갈보리산 언덕에 올라가서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면서 50여명이 서로 껴안고 울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는 이미 십자가 지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철야기도 하셨고, 온 밤을 지새워 가야바의 법정, 빌라도의 법정, 헤롯왕의 법정으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심문을 당하시고, 그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에 맞은 흔적에서 피가 나고, 그런 몸으로 180근이 넘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너무 힘들어 쓰러지셨고, 그때마다 로마 병정이 내려치는 채찍에 맞아 다시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고통 중에서 18번이나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힘이 없어 십자가 지지 못하기에 저 아프리카 리비아에서 온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으나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서는 주님이 그 십자가를 다시 지셨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이 오후 3시에 운명하시기까지 6시간동안 피 흘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원래 십자가라는 것은 페니키아라고 하는 나라에서 흉악무도한 죄인을 처형시키는 사형틀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좌우편에 두 살인강도가 십자가에 못박혔던 것은 그들이 지은 죄 때문에 형벌로 십자가에 못박힌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슨 죄가 있기에 흉악무도한 살인강도나 반역자들에게만 지게 했던 십자가 형틀을 주님에게 지워서 죽게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죄인된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랑의 확증이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우리 조상 아담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태어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었으니 이것을 유전죄, 원죄라고 말합니다. 이 죄의 결과로 사망이 왔으니 사망이라는 말은 죽었다, 끝났다는 의미에 앞서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물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생물이 살아갈 수 있는 영역을 정해주었습니다.
한 예를 들면 고기는 물 속에서만 살라, 그렇게 고기의 삶의 영역을 물로 한정시켜 주었는데 고기가 물이 싫다고 물 바깥으로 튀어나오면 그것을 분리된 상태라고 말하고 결과를 사망이라고 규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의 영역을 하나님 말씀으로 정해 주었습니다.
그 말씀을 불순종하게 되면 인간에게 죽음이 온다,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했는데,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하는 선악과를 범하므로 인간에게는 사망이 왔습니다. 이 사망은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 즉 영적인 죽음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광스럽고 모든 것이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의 모습을 시 107:10절에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죄로 타락한 인간은 사망 길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왜 사는 것인지, 한 세상 살고 난 이후에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여 흑암, 캄캄한 밤에 방향을 잃어버린 나그네처럼 그런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생들이 이렇게 사망 길에서 허덕이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마을에 초등학교 4학년 남학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얼굴에 흉터가 너무 많아서 동네 아이들이 그 어머니를 문둥이라고 놀려댔고, 그 아이는 문둥이 아들이라고 비방을 했습니다. 그 아이는 집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싫어했고, 학교에서도 놀림 당하다 보니 학교 가기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학교 안가겠다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왜 그러느냐고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나보고 문둥이 아들이래 하고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때에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 얼굴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네가 두 살 때 일이었다. 나는 밭에서 일하고 있었고, 넌 방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에 불이 났단다. 내가 급히 달려갔지만 이미 너는 불 속에 갇혀있었단다. 그러나 난 네가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갔지. 담요로 너를 감싸고 뛰어나왔는데 너는 담요에 감싸있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나는 불에 휩싸이는 바람에 얼굴을 너무 많이 데여 오늘날 이렇게 되었단다
어머니의 말을 들은 아이는 비록 어린아이였지만 자기 어머니의 얼굴이 문둥이처럼 돼버린 것은 바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그는 어머니의 얼굴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다시 가게 되었고 동네 아이들에게 이 세상에 우리 어머니처럼 멋있는 어머니가 없다고 자랑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젊은이가 예리한 칼을 들고 동네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나는 5분 이내로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일 수 있소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그 칼로 하늘을 향해 내지르면서 하나님이 만약 있다면 5분내로 이 칼을 가지고 나를 죽여 보시오 당신께 도전하는 이 나쁜 놈을 죽일 수 있다면 당신은 살아있는 분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5분을 세기 시작합니다. 5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무런 일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선언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이라고 외쳤습니다. 나 같이 악한 사람을 벌할 수 없다면 그는 신이 아니요, 또 악한 사람을 심판할 줄도 모르는 신이라면 혹시 있다 할지라도 무슨 유익이 있겠냐고 외쳐댑니다. 그러자 교회를 잘 다니는 어느 할머니 한 분이 그 젊은이 앞에 나가서 그 칼을 뺏어 들고 그 젊은이에게 아이가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귀여운 아들이 하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그렇다면 당신은 그 귀여운 아들이 이런 칼을 들고 와서 아버지, 이 칼로 나를 5분내로 죽여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젊은이는, 그런 소리가 어디 있느냐,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들을 어떻게 죽일 수 있느냐고 대답했습니다.
그때에 할머니가 젊은이를 붙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요. 하나님은 어떤 죄인, 악한 사람이라도 벌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당신같은 악한 사람이라도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 참고 계시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밖에 없는 독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은 죄인을 심판하러 보내신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 보내주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했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콩쥐, 팥쥐 이야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또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이야기의 내용과 교훈에는 선하게 살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나쁜 사람은 벌을 주신다는 권선징악의 의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한 자라도 벌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다 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는 줄 믿습니다.
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의롭지 못하고 선하지 못하며 경건하지도 않다 할지라도 그를 벌하지 않고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었다면 그것이 조건을 초월하는 사랑인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 4:5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착한 일을 하거나 경건한 삶을 살지 않았다 할지라도 믿는 자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었으니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피 공로를 믿기만 하면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니 이것은 인간의 공로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것이며 값없이 주시는 주님의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저의 큰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들이 저희가 살고 있던 아파트 마당에서 친구하고 장난치다가 그만 아파트 현관문을 깨버렸습니다. 수위 아저씨가 화가 나서 달려오니까 얘가 겁에 질려 도망 와서 내 뒤에 숨었습니다. 막 떨면서 큰일났다고, 유리를 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뒤쫓아온 수위 아저씨가 당신 아들이 유리 깼으니 빨리 유리 값 물어내라고 성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냐고 물었더니 15만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제 아들에게 네가 깼잖아? 네가 물어줘 했더니, 아빠 나 돈 없어 하고 울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우리 아들은 15만원이 없었습니다. 단돈 15원도 없었습니다. 돈 없으면 경찰서에 가서 며칠 살다가 와. 그러자 아니야, 싫어. 나 무서워, 하며 막 울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15만원을 수위 아저씨에게 주며 미안하다고 사과했습니다.
3시간 후에 가서 보니까 깨진 유리는 깨끗이 치워지고 아파트 현관에는 새 유리가 끼워져 있었습니다. 유리가 박살나 있을 때는 우리 아들이 수위 아저씨를 보면 구석으로 도망 다녔습니다. 그런데 새 유리가 끼워지자 어깨를 쭉 펴고 목에 힘을 주고, 수위 아저씨를 봐도 하나도 겁내지 않고 떳떳하게 그 길을 걸어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아이가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를 얻게 된 것은 자기 공로는 1원도 없었습니다. 15만원 내가 다 물어주었습니다. 아들의 입장에서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지 자기 행위는 0.01%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고 어린양 예수의 피로 된 줄로 믿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으니 이것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으니 사람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사랑과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된 것이니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그 주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될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의 비밀,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 예수에게 우리의 죄악을 담당시켜 죄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두번째 십자가의 의미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화목을 위한 화목제물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난 이후부터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는 죄악의 담이 있었습니다. 불러도 대답할 수 없었고, 하나님이 올 수도 인간이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다 이루었다고 외치실 때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가로놓여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 내렸습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평생 자랑은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욥기서 22:21절 말씀에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했으니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의 피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 우리 죄를 없애버리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마 16:24절 말씀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나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도 십자가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따르는 방법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이겠습니까?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죽을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수치와 고난을 감수하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고 병고침 받고 복 받았고, 아들 딸 잘 되고 그런 간증은 많이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은혜주신 목적이 그런 것 자랑하라고 준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여 믿지 않는 사람을 구원하고 방황하는 인생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은혜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런 십자가를 일컬어 사명의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사명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는 에스더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페르시아에 유태인으로서 한 관리였던 모르드개라는 사람이 있고, 유태인 여인으로서 아하수에로왕의 부인, 왕후 에스더가 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가 세계를 제패하여 모두 127도나 되는 큰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데 그때 국무총리의 이름이 하만입니다. 그런데 이 하만이 교만합니다. 또 그렇게 교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왕이 그를 신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만이 길을 지나가면 누구든지 다 엎드려 절을 하는데 유태인 모르드개는 절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굽신 거리지 않고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 때문에 화가 나서 신분을 조사해보니 유대인이었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되 그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언제 죽일까 하고 제비를 뽑았는데 그 날이 12월13일이었습니다. 그 날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고 재산을 몰수하려는 엄청난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 안타까운 사실을 알게 된 모르드개는 옷을 찢고 굵은 베옷으로 갈아입고 성중에 나가서 방성대곡하다가 대궐 문 앞에 와서 엎드렸습니다. 모르드개가 대궐 문 앞에 엎드려 있다는 사실을 왕궁에 있는 에스더가 알게 되어 무슨 일인지 묻자 모르드개가 사실을 고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으로서 왕궁에 홀로 있으니 모든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할 때 너만 홀로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 오늘날 왕후가 되게 한 것은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고 말이 없으면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유대인을 구원할 것이요 너와 네 집은 망할 줄 알라고 경고합니다.
사실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관계는 사촌지간입니다. 모르드개는 나이가 많았고, 에스더는 일찍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 모르드개가 친딸처럼 길렀던 그런 관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로 왕후가 된 것입니다. 그때 에스더가 이 나라 경호법은 엄한여서 왕후나 왕의 아들 딸이라도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나가면 죽이는 법이라고 말합니다.
얼마전에 내가 신문을 보니까 북한의 김정일에 대한 경호법이 얼마나 엄하든지 김정일 별장 2km안에 어떤 사람이 실수하여 들어왔는데 총살해서 죽였습니다. 아마 페르시아 왕 경호법도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그때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통지합니다. 내가 사명감을 가지고 십자가 지겠습니다. 3일동안 내 시녀와 더불어 금식을 하고 왕 앞에 나가서 이 사실을 구하겠습니다. 그러니 모르드개여 당신과 수산궁에 살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은 나를 위해서 3일동안 금식해 주십시오.
금식을 마치고 에스더가 민족을 구원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왕후복을 차려입고 왕궁 맞은편 뜰에 서있습니다. 보좌에 앉아있던 아하수에로왕이 에스더를 바라보니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보인지라 금홀을 내어밉니다. 금홀이란 금으로 된 왕의 지휘봉입니다. 내어민다는 말은 너를 용서한다하는 의미와 함께 무슨 소청이 있기에 왔느냐, 말해 보라하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에스더가 금홀 끝을 만지면서 내가 왕을 위해서 잔치를 한번 벌일테니 하만과 함께 오시라고 초청을 합니다. 그 후 잔치자리에서 하만의 모든 음모를 폭로하자 왕이 노하여 국무총리 하만은 높은 장대에 달아 처형시키고, 유대인이 죽임을 당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12월13일 날에는 하만과 합세해서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을 대신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악한 자들은 처형당하고 모르드개는 국무총리가 되었으며, 에스더는 왕의 사랑을 더 입게 되었습니다.
페르시아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하나님 은혜로 편안히 살 수 있었고, 많은 페르시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부러워하여 유대인으로 적을 바꾸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이스라엘 민족의 명절중의 하나인 부림절에는 삼일동안 잔치를 벌이는데 그 절기는 그런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져야 할 십자가, 주님이 지라고 명한 십자가가 어떤 것입니까?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고난과 수치를 감수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와서 대우받거나 자기 이름을 내려는 사람은 많아도 이름 없이 빛 없이 힘들고 어려운 짐을 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 지는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주의 뜻을 이루어 가시며 그에게 복을 주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희생하면 희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만 썩지 않은 밀알은 언제나 한 알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성경을 많이 알아도 십자가 지지 않은 사람들은 항상 그 모양 그 꼴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될 때 금세에서 백을 얻고 내세에 영생 얻지 못할 자가 없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막 10:29-30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역리적 진리입니다. 버린 만큼 얻게 하시고, 낮아진 만큼 높여주시며, 희생한 만큼 얻게 하시는 비밀,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편지할 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낮아지면 주님이 높이십니다. 희생하면 주님이 보상하십니다. 그런 십자가를 능히 지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범죄하는 이유가 자기는 희생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남을 희생양으로 삼아서라도 자기가 출세하겠다는 마음 때문에 이 세상에 전쟁이 있는 것이고, 작게는 부부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이 십자가를 질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결심만 갖고는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위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친아들이시라도 이 대속의 십자가를 앞에 놓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했고, 눅 22:40절 이하 말씀에 보면, 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얼마나 깊은 기도, 애절하고 간절한 기도를 했든지 그 때가 겨울인데도 얼굴에서 땀이 솟구쳐 나오는데 핏방울처럼 되기까지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때 위로부터 천사가 내려와 힘을 도왔다고 했습니다. 위로부터 힘이 와야 십자가 질 수 있습니다. 위로부터 지혜가 임해야 주의 일 할 수 있습니다.
시계추처럼 교회에 왔다 갔다 한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 힘있고 능력있고 권능있는 십자가의 군병이 될 수 있습니다.
나무는 그 뿌리를 강변과 진토에 내릴 때 수분, 양분 다 뽑아 잎으로 공급하고 가지로 공급해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성경에는 우리 인간을 나무로 비유했습니다. 나무를 의인화하여 가르친 말씀이 아주 많습니다.
렘 5:14절 말씀에 보면, 이 백성으로 나무가 되게 하리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좋은 열매 맺는 나무는 더 많이 맺도록 깨끗케 하고 나쁜 열매 맺는 나무는 찍어버린다. 그것은 나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인간을 나무로 비유한 것입니다.
나무가 땅속에 뿌리를 내려야 거기로부터 모든 것을 얻어 생명을 유지하고 어떤 것을 생산해 내는 것과 같이 인간의 뿌리는 어디이겠습니까? 인간의 뿌리는 머리이고, 이 머리는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이 지었으니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때 위로부터 내리는 능력이 모든 것을 하게 할 줄로 믿습니다.
출 14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60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로 부리던 바로왕은 그 백성을 다시 찾기 위해서 많은 군사를 찾기 위해서 다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 이르렀을 때 진퇴양난에 빠집니다.
그때에 모세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합니까?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애굽의 군대를 바라보면 오금이 저립니다. 앞에 있는 바다도 보지 않았습니다. 길이 막혔으니 답답할 뿐입니다.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들어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강한 동풍을 불어오게 하사 바다 가운데 길을 내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가운데로 열려진 길을 따라 구원을 받게 되고, 하나님 백성 괴롭히는 애굽군대는 수장되어 심판을 받게 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앞으로 전진할 수도 없고 뒤로 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 인간의 한계상황의 벽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사는 길은 위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도움을 구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현장에서 경험되어지고 얻어지는 지혜와 경험으로만 살지 말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베트남 전쟁시에 존슨대통령은 군사들을 향해서 미국이 개발한 신무기를 가지고 싸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신무기를 가지고 10년 동안 싸웠는데 결과는 패전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걸프 전쟁이 일어났을 때 당시 대통령은 빌리 그래엄 목사님을 백악관으로 초청해서 이틀동안 기도회하고 전쟁했는데 6일만에 승리했습니다. 신무기를 가지고 싸우라고 명한 대통령과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전쟁을 했던 대통령은 전혀 차원이 달랐습니다.
오늘날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학교에서 배운 공부나 학원에서 배운 기술, 그리고 많은 경험을 토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것은 모든 일반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삶의 방법은 조금 달라야 합니다. 그것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역대상 10:7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이 블레셋 군대와 싸우다가 패하여 그의 아들과 함께 전사합니다. 성경은 그의 죽음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을 당한 사울은 갑옷이 벗겨지고 잘려진 그의 목은 블레셋 사람의 우상, 다곤 신앞에 전리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역대상 10:13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 앞에 범죄함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였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로 옮기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는 매사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백성 통치하라고 세운 것입니다. 사울도 처음엔 잘 했지만 나중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처음 가졌던 복된 마음을 끝까지 가지시기 바랍니다.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간만 못합니다.
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칩니까?
왜 처음엔 겸손하다가 나중엔 교만해집니까?
그러나 다윗은 정반대입니다.
역대상 14장에 나오는 말씀, 사울의 뒤를 이어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블레셋에서 다윗이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쳐들어옵니다. 르바임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내가 이 블레셋 사람을 치러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저들을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기를 올라가라. 내가 저희를 네 손에 붙일 것이니 올라가라 하매 다윗이 하나님 말씀을 믿고 올라가 치니 승리하였습니다.
그 다음 몇 년 지난 뒤에 블레셋 사람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침범해왔습니다. 그때도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 가로되 마주 올라가서 치리이까? 이번에는 마주쳐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가라.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나가서 싸우라. 하나님이 네 앞에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매 이번에는 뒤로 돌아가서 적을 치니 또 승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반복된 말씀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 이것 하리이까, 그만 두리이까, 매사에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여러분, 범사에 그를 인정하십시오.
그가 여러분의 길을 지도해 주실 것입니다. 잠언서 3:5-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지혜로운체 하지 마십시오. 잘난 체 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학벌, 지위, 명예, 권세, 경험 가진 사람일수록 무릎 꿇지 않습니다. 하나님 도움 없이 내 멋대로 살아보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하나님이 돕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다윗보다는 사울이 훨씬 훌륭했습니다. 키도 컸고, 싸움도 잘하고, 힘도 세고, 가문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릎 꿇지 않고, 기도하지 않았고, 선지자의 말을 우습게 알고 곁길로 가더니 망했습니다.
모든 것을 볼 때 감정적으로 인간적으로 볼 때 약했던 다윗이지만 때마다 일마다 무릎꿇고 기도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높이 들어 쓰셨습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똑똑하고 잘난 사람보다는 좀 부족해도 십자가 의지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지혜롭게 하지 않느냐, 모든 것을 가진 자를 부끄럽게 하지 않느냐?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보십시오. 반드시 주님은 보상하시고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우리 몸이 우리 것이 아니고 주님의 성전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몸이 의의 병기로 쓰임 받을 때 주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좋은 것들을 아끼지 않고 넉넉하게 채워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사울처럼 살지 말고, 다윗처럼 삽시다.
시련과 연단이 와도 좋은 날을 기대하면서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그 날이 오기까지 참으십시오. 십자가는 참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참는 것입니다.
모든 전쟁은 참지 못한 데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모든 실패도 참지 못한 데서부터 옵니다.
구레네 시몬은 자원해서 십자가 진 것이 아니고 로마 군병이 시켜서 억지로 십자가 졌습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하다보면 자원해서 지는 십자가도 있지만 때로는 억지로 지는 십자가도 있는데 억지로라도 주를 위한 십자가를 지게 된 사람은 복을 주십니다.
그의 가족이 다 예수 믿게 되었고, 그의 십대손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는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희생의 제물이 되고 교회를 위해서 십자가 지며, 안 믿는 영혼을 위해서 전도하다가 당하는 고난과 수치가 있을 때 주님은 반드시 우리 당대 아니면 우리 후손에까지라도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지금은 사순절기입니다. 근신할 때입니다. 정신차리고 기도하고 회개할 때입니다.
우리 모두 사순절기에 주님 만나고 영성을 강화시켜 예수 닮은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 변화 받아 주님과 동행하는 승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사게재일: [2003-04-16 오전 9:4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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