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순종의 아브라함 창12:1-4
믿음의 조상 순종의 아브라함에 대해 은혜 받는 귀한시간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 가족이 어느 날
어린 아들이 뒤뜰에서 혼자 놀고 있는데 갑자기 아빠가 급한 목소리로 아이를 불렀습니다.
“얘야, 얼른 땅에 바짝 엎드려라!”
그 아이는 대꾸하지 않고 즉각 땅에 엎드렸습니다.
“자, 이제 내게로 빨리 기어와” 아이는 시키는 대로 기어갔습니다.
“이제 일어나서 나에게 뛰어와!” 그 아이는 아버지의 품으로 달려와 안겼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자기가 놀고 있던 나무를 쳐다봤더니.
거기엔 커다란 무서운 코브라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만일 그 아이가 아빠에게 짜증을 내고 “지금 놀고 있는데 … 당장 가야 해요?”하며
꾸물거렸더라면 어떤 결과가 빚어졌을지 상상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즉각적인 순종은 믿음과 사랑의 증거입니다.
주님의 음성에는 바로 순종하는 것이 큰 복인 것을 아시고. 믿음으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1. 순종은 축복을 위한 시험이었습니다.
창세기 12:1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향을 떠나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친척을 떠나라. 다시 말씀드리면,
고향도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내가 가라는 곳으로 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상숭배 하는 땅, 우상 숭배하는 가정에서 아브라함을 불러 내셨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고향을 사랑합니다. 부모를 그리워합니다. 친척을 사랑합니다.
일본에 살고 있던 조총련계 교포들도 고향이 그립고 혈족이 보고 싶어서
한국에 돌아 와서는 부모형제를 끌어안고 울고 부르짖으며
다시는 고향을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눈물겨운 광경을 볼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고향이 좋고 혈연은 끊을 수 없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고향을 떠나고 부모 친척도 버리라”고 하시니 이것은 참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괴로운 시험이었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적으로 참고 감당하기 어려운 명령을 하셨습니까?
아브라함을 슬프게 하고 괴롭히고 불행하게 만들려고 이렇게 하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악으로 사람을 시험치 않습니다.
야고보서 1:13에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시험하시는 것이겠습니까? 이 시험은 시련인데
더 큰 믿음으로 키우시고 더 큰 복을 주시려고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련에는 반드시 축복의 약속이 따라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본토와 부모 친척을 떠나라고 하신 다음에 크게 축복하시는데
그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무지무지한 축복입니다.
큰 민족·복의 근원이 되어서 세상 만민으로부터 저주는 받지 아니하고
축복만 받게 하시는 절대적인 은혜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그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2. 순종하니 약속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5:1-5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자식이 나서 네 후사가 될 것이라”고 하시며
자식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는 자식이 없어서 퍽 섭섭하게 생각하면서
자기 집에서 키운 다메섹 사람 엘리 에셀을 상속자로 삼을까 하고 생각하여 보기도 하였고, 또 애굽 사람 여종 하갈을 후실로 삼아서 이스마엘을 낳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사람들이 네 후사가 될 것이 아니라 “네 몸에서 자식이 나서 그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였고 사라는 90세였는데(창 17:17)
자기들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또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창 17:1),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창 18:14)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서는 완전히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 믿음을 보시고 그것을 의로 여기셔서 또 축복하시는데
“내가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창 15:6-7).여기에서 아브라함은 이성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성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과학을 초월합니다.
100살이나 된 자기와 자기 아내가 늙어서 자식을 낳을 수 없는데도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은 참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믿을 수 있는 것이야 누가 못 믿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사랑하셔서
의롭다고 하시고 그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3. 아브라함은 절대순종 함으로 축복을 받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 땅으로 데리고 가 잡아서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괴롭고 아프고 슬픈 명령이었습니까?
100세까지 자식이 없다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능력으로 받은 자식인데
그 어린 자식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시니
보통 인정으로는 참 순종할 수 없는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하나 주시더니 그 아들을 잡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시니 이럴 수가 있는가?
네 후손이 하늘의 별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 아이를 죽이면 그 약속을 어떻게 된단 말인가?
이렇게 의심하고 이렇게 원망할 수도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일체 이렇게 하지 아니하고 순종하였습니다.
외아들 이삭을 잡아서 제사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참 순종할 수 없는 것을 순종하였으며. 절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참 순종입니다. 순종할 수 있는 것이야 누가 순종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순종할 수 없는 것을 순종하였습니다.
이렇게 순종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또 크신 축복을 약속하였습니다.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게 되고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메시야를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시는 것과
그리고 이 명령에 순종하는 모습 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었고 순종할 수 없는 것을 순종하였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절대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고 순종할 수 없는 것을 순종하는
아브라함을 사랑하셔서 크게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겠다. 네 후손이 하늘의 별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도록 하겠다.
네 후손 중에서 메시야가 날 것이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이루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절대적인 믿음에 절대적인 은혜를 주십니다.
절대적인 순종에 절대적인 축복을 주십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어떻게 하였습니까?
앞으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즉각적인 순종은 믿음과 사랑의 증거입니다.
주님의 음성에는 바로 순종하는 것이 큰 복인 것을 아시고. 믿음으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결론으로 벤쟈민 슈몰크 목사님을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독일 전역이 30년간의 종교전쟁으로 폐허가 됐을 때
눈물의 기도를 드리던 한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핍박받는 신자들의 가정을 찾아다니며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독일 전역에 흑사병이 나돌아 1천 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독일은 거대한 무덤’과도 같았습니다.
벤자민목사 부부는 어느 날 중병을 앓고 있는 한 신자의 가정을 심방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처참한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와 집이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해 있었으며.
사랑하는 두 아들은 서로 껴안은 채 죽어 있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아들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울면서 조용히 기도를 올렸습니다.
“내주여 뜻대로 행 하시옵소서/온몸과 영혼을 다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 간 주 인도 하시고/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이 사람의 이름은 벤자민 슈몰크 목사님 입니다
그때 올린 기도에 곡이 붙여진 것이 바로 찬송가 431장
‘내 주여 뜻대로 행 하시옵소서’다.
고통과 시련까지도 순종하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본받아 순종의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