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감동을 회복하는 그리스도인!
10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12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3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14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애굽기 14: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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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할머니가 교회는 열심히 다니는데 구원받은 확신이 없어서 고민하였습니다. 하루는 그녀가 나가는 교회의 목사님을 찾아가 구원받은 확신이 무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은 "만약할머니의 집에 두 이웃이 있는데 한 집에서는 매일 찬송소리가 흘러나오는데, 다른 이웃집에서는 늘 먹고 마시며 즐겁다고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온다면 어느 집의 소리에 더 마음이 쏠리겠습니까?" 라고 하자 그 할머니는 "그야 매일 찬송소리가 흘러나오는 가정에 귀가 더 쏠리지요."라고 하였다. 그 때 목사님은 "안심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증거입니다"라고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들어가는 말]
오늘날 한국에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미국 CIA의 각국 보고서를 보면 한국은 기독교인구가 41%라고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나라 국민의 4명 중 한 명이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의 향취가 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길거리를 다니며 사람들을 볼 때에도 분명히 4명 중 한 명은 그리스도인일텐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얼굴을 찾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분명 교회에서 볼 때에는 은혜 받은 사람들뿐인데 왜 이 사회에서는 이렇듯 은혜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찾을 수 없는 것일까요?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엔 그 어디에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우리의 현실에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요? 그 답은 하나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동을 잃어버렸기 그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삶에서 지치고 찌들어진 모습으로, 세상의 그 누구들처럼 삶아가고 있고,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분간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과 교회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동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앞에서 말씀드린 할머니처럼 우리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질 못하고 있습니다. 확신이 없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하나님의 언약이나 장래에 대한 소망도 없습니다. 그저 우리의 신앙행위는 종교적 행위일 뿐이고, 우리의 삶은 점점 더 지쳐갈 뿐입니다. 교회에 앉아 있을 동안에는 무언가 가슴이 뭉클하지만 이내 교회를 떠나면 그 뭉클했던 감정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립니다. 다시 우리의 심령은 답답하고, 뭔가 허전하고 공허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러한 감정과 지쳐버린 삶이 결국 그리스도인들을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냅니다. 지금 우리의 생활 대부분이 이런 삶으로 지쳐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텅빈 공원의 벤취처럼 모든 것이 허전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으로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대한 기쁨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이 기쁨은 우리의 깊은 심령 가운데 내재되어 있어서 그것에 대한 어떤 형태의 유무(有無)를 논할 수는 없지만, 이 내재되어 있는 기쁨이 삶의 질을 결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질을 통해서 내 안에 구원이 역사하는지를 분간할 수 있습니다.
구원(救援 ; salvation)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입니다. 성경 이사야 43:11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증거합니다.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따라서 구원은 역사 속에서 성취되되 우리의 영(靈)과 육(肉)의 모든 대적자로부터의 참된 해방입니다. 또한 이는 단순한 위험이나 위험한 상황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기 위한 구원이라는 더 넓고 깊은 의미을 가집니다.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인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들이면서 다음과 같이 소리 높여 찬송하였습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포할지어다.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지어다.”(역대상 16:23, 24)
“그 구원을 날마다 선포할지어다 ……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지어다!”
이 얼마나 힘찬 외침입니까? 오늘 우리는 과연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대해 이렇듯 기쁨과 큰 감동으로 찬송할 수 있습니까? 또한 우리의 삶 속에서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만민에게 선포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동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힘 있고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위에 굳게 서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대한 기쁨(감동)의 회복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또한 구원의 은총에 대한 기쁨(감동)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마땅히 감당하여야 할 사명들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충만하게 제공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범죄하여 깊은 수렁에 빠졌던 때에 하나님 앞에 드려진 기도와 찬송을 함께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시편 51:10-13)
[본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어서 출애굽 사건은 인간이 누리는 기본권 중에서 자유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선택되어졌고, 또한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서 신앙을 위한 자유는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말하면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반드시 하나님을 위해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고 예배하기 위하여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영적(靈的)”인 자유뿐만 아니라 실제로“육적(肉的) 혹은 신체적(身體的)”자유도 주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 대해서 영․육간에 전인적(全人的)인 안녕과 복지를 주셨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께 영적인 예배를 할 수 있는 영․육간의 자유와 안녕 그리고 복지를 이스라엘 자손들이 성취(成就)받는 사건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은총을 받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유를 향하여 나갈 때 이들은 너무도 행복했습니다. 또한 너무도 홀가분했고, 새 소망의 흥분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희망에 가득 찬 발걸음을 막 옮기려던 차에 저들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애굽 바로의 추격입니다. 당시의 관례로 본다면 도망친 노예는 반드시 사형에 해당하는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였습니다. 이러한 관례를 잘 알고 있던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두려워 떨게 되었고, 그 두려움은 급기야 큰 소요를 일으켰으며 자신들의 지도자인 모세를 향하여 원망으로 나타났습니다. 조금 전까지 충만했던 구원의 감동, 구원의 기쁨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이제 그들에게는 크나큰 공포와 원망만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동과 기쁨이 사라지면 곧이어 원망과 시비가 우리 자신을 점령하게 됩니다. 이것은 영적인 원리임과 동시에 세상적인 원리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감사가 사라지면 불평이 나오고, 찬송이 끊기면 악한 말들이 나오고, 믿음이 사라지면 불신의 행위가 왕노릇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들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동과 대립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들은 죽음과도 같은 억압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겁에 질렸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가 저들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 자손들은 속수무책이었고, 향방을 알지 못해 방황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비단 4,000년 전에 애굽을 탈출하려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의 구원의 기쁨을 잃고 있는 현대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현상들이 우리 자신에게 나타나는 것일까요? 그 답은 바로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동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은총을 잃으면 어떠한 현상들이 나타나는지 본문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동을 잃게 되면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10절 하)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은총에 대한 감동이 식어질 때, 우리를 제일 먼저 찾아오는 현상은 환경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구원하심에 대한 은총이 충만할 때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의지하고 따릅니다. 하지만 구원하심의 은총에 대한 감정이 사라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던 모든 사실을 잊게 되므로 점차 환경적 조건과 상황에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의 내면 가운데 나타나는 현상이 두려움입니다.
창세기 15:1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라함이 북방의 4개국의 군대를 물리치고 조카 롯을 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후에 북방 왕들의 복수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하신 말씀이 창세기 15:1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무서워하고 두려워한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북방 왕들의 복수였습니다. 힘으로는 저들을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318명의 군사밖에 더 이상의 군대는 없었습니다. 만약 북방의 왕들이 다시 내려온다면 이번에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순간에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에 대해 잠시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과 구원에 대한 감동이 식어지면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우는 아브라함이라 할지라도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에 대한 감동이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동이 충만할 때 우리는 결코 남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감동이 충만하면 더 이상 우리 내면에 그 어떤 다른 것을 용납할 공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의 조건과 상황을 볼 여유가 없어집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동이 늘 우리 가운데 충만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늘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를 바라보는 일에 충만하여야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브리서 12:1-3)
예수를 바라볼 때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동이 되살아납니다. 예수를 바라볼 때 현실의 암담함을 볼 여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를 바라볼 때 여러분 앞에 놓여져 있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 보입니다. 예수를 바라 볼 때 우리 안에 있던 모든 불안은 걷히는 안개처럼 우리의 현실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안목이 열리고, 또 예수를 바라봄이 충만하여지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동을 잃게 되면 원망과 불평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됩 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12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11절-12절 상)
감사와 기쁨은 그리스도인들의 심볼(symbol)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감사와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항상 기뻐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6)고 했습니다.
근대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예수, 나의 기쁨(Jesu, meine Freude)』는 곡이 있습니다. 바흐는 이 곡을 통해 가사에 들어있는 여러 가지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했습니다. 전반적으로 가사의 내용 중, 성경 구절은 예수를 통한 구원을 말하고, 코랄은 신도들이 예수를 보낸 신에 대한 사랑과 예수로부터 얻을 평안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 곡의 가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 나의 기쁨, 참 기쁨의 근원, 참된 내 친구
갈급한 내 마음 주를 사모하여 목이 탑니다
흠이 없는 어린 양 그 품 안에 괴롬 없어 더 바랄 것 없도다
주의 품에 안겨 편히 쉬는 나를 누가 해치랴
땅이 흔들리고 모두 떨지라도 겁낼 것 없도다
죄와 지옥 물결이 우리를 덮쳐도 주는 피난처라
기쁨의 주 예수 우리 함께하니 슬픔 없어라
하나님의 자녀 폭풍 속에서도 평화로와라
아무 일을 만나도 주 안에는 기쁨 있어 주는 나의 보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구원의 기쁨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풍파와 고난 그리고 죄와 죽음까지도 능히 이기고 감당할 수 있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능력이 그리스도인들 안에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구원의 기쁨이 사라지게 된다면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결국 과거의 습성에 따라 살도록 만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거 습성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원망과 시비와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으며 다툼과 분쟁이 쉬지 않는 그런 삶의 습성이겠지요.
이스라엘 자손들이 홍해 앞에 섰고 그들의 뒤로는 애굽 바로의 군대가 서슬퍼런 칼과 창을 휘두르며 뿌연 먼지를 일으키면서 전차를 몰고 오고 있습니다. 보이는 모든 것이 암담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여기 그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불기둥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도하던 불기둥이 애굽의 군대와 이스라엘의 진영 사이에서 애굽 군대의 더 이상의 진출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의 기쁨이 사라진 사람들은 바로 이 장면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애굽 군대가 나타나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불기둥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앞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애굽 군대가 나타난 이후 하나님의 불기둥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후미로 돌아서서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들어오는 것을 철저히 가로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현실로 인해서 불안함이 가중될 때 우리는 원망하고 불평하며 불만과 시비를 쉬지 않습니다. 허나 이러한 과거의 습성은 결코 우리를 이롭게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서 점점 더 멀어지게 하며, 하나님의 진노만 얻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여기에 대한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13절)
제가 조금 전에 답이 아주 간단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본문의 말씀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서라!”,“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정말 간단하면서도 단순한 말씀입니다. 어려움과 위기를 만난 그리스도인들이 행할 수 있는 일이란 이렇듯 간단하면서도 단순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말씀을 조금 더 상고해 보겠습니다.
“가만히 서라!”라는 말씀 이전에 “두려워 말고”라는 말씀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렇습니다. 즉 악화된 상황과 위기에 우리 자신의 마음이 휘둘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위치와 자리를 고수(固守)하여야 합니다. 어려움이나 위기가 왔을 때 상황에 휘둘려 우왕좌왕(右往左往)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우왕좌왕이나 좌충우돌(左衝右突)하는 행동은 더 큰 사고와 위기를 만들어낼 뿐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자손들이 현 상황에 휘둘려 우왕좌왕하거나 좌충우돌한다면 애굽의 군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들 스스로에 의해서 수많은 사상자들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제국에 새로이 등극하는 솔로몬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왕상 2:2-3)
온실의 화초처럼 자라 소심한 솔로몬이 다윗에 의해 확장된 이스라엘 제국을 온전히 통치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입니다. 때문에 다윗 솔로몬이 하나님을 향하여 굳게 서는‘대장부’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을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선다는 것은 매우 복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향하여 서 있는 자를 위해 친히 일하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위기와 어려움을 만났을 때 현실에 얽매여 좌충우돌, 우왕좌왕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굳게 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 주님께서는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굳게 서서 하나님을 바라봄에 있어서 하나님의 그 무엇을 볼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본문의 말씀에서는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만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안으로 하나님을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시는 일들은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움과 위기를 만났을 때 믿음의 반석이 되시는 예수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를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 행하시는 구원사역은 우리에게 직접적인 체험이 되고, 또한 그 체험은 평생 잊지 못할 산증거가 되어 우리의 평생 동안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찬송케 할 노래의 제목이 될 것입니다. 이에서 우리는 감사와 찬송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억지로 감사하거나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시편 137:1-3)
바벨론 사람들이 포로로 억류되어 있는 자들에게 성전의 수금을 타며 자신들을 위해 찬양하라 하였을 때, 이스라엘인 포로들은 차라리 바벨론 강변의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놓고 자신들의 재주를 사장시키겠다고 하였습니다. 억지로 하는 것은 인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 때문에 결코 이를 행함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원함과 기쁨 그리고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는 언제나 즐겁고 유쾌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가 감사하라 하여서 감사하는 것은 진정한 감사가 아닙니다. 또한 어느 교우가 떠밀어서 특송하는 것은 진정한 찬양이 아닙니다. 진정한 감사와 찬양은 언제나 자기를 구원키 위해 독생자를 희생시키신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경험한 사람들에 의해서 불려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기와 어려움에서 상황과 현실에 주목하기 보다는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어떠한 일들을 하고 계시는지를 바라봄으로 우리가 운데 원망과 불평이 사라지게 하여야 할 것이며, 또 나를 위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경험함으로써 살아있는 찬송과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셋째,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동을 잃게 되면 죄된 생활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12절 하)
타락된 인간은 죄된 본능에 충실합니다. 마치 그것이 어머니의 젖가슴인양 어머니의 가슴을 더듬는 어린 아기들처럼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동을 잃게 된 사람은 언제나 과거의 옛된 생활로 돌아가려는 습성이 발동되기 때문에 옛 생활로 돌아가게 됩니다.
마태복음 12:43-45의 말씀은 이러한 생활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잘 설명해 주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 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은혜의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마귀의 역사가 얼마나 더 강하게 우리 자신들을 제압하는지를 일러주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되는 것이 영적 원리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잃고 옛된 생활이 편하고 좋다하여 돌아가게 된다면 분명 그는 과거보다 더 죄악된 생활에 빠져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위기에 내몰렸을 때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눈이 먼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위기를 결코 위기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위기를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시는 축복의 기회라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사와 감동을 잃고, 또 하나님과의 밀접했던 은혜의 관계가 식어 원망과 불평을 일삼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가 과거의 죄된 생활보다 더 심한 타락의 생활로 돌아가게 됩니다.
만약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로와 애굽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저들에게 놓여질까요?
그것은 죽음과 혹독한 형벌과 노역일 뿐입니다. 저들이 과거로 돌아갔을 때 저들에게 유익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 혹독하고 극심한 속박과 억압 그리고 비참한 현실들이 저들을 맞이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죽으나 사나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구원의 은총을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들 앞에 있는 현실이 공포스러운 홍해와 죽음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운 인도하심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날마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에 대한 감사를 소가 우사에서 낮에 초원에서 뜯어먹었던 풀을 되새김질 하듯 되새김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옛되고 죄된 습성으로 돌라가려는 우리의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에 대한 감사와 감동이 넘칠 때, 우리가 가지고 있던 육신의 욕망이 죽어갑니다. 또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에 대한 찬송이 불려질 때, 옛된 생활에 대한 향수가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에 대한 기도의 되새김질을 할 때, 우리 육신에 깊게 뿌리박혀 있던 옛된 습관들이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 바 된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신앙과 삶의 본질은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과 이를 위해 친히 희생제물이 된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들의 본질이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는데, 어째서 그 구원하는 은총에 대한 감동을 잊고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은혜롭고 능력 있는 삶을 살고, 하나님께서 기뻐게 받으시는 예배를 온전히 드릴려면 우리는 늘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에 대한 감동으로 충만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감동이 여러분들과 저의 생활과 심령 가운데 가득할 때 이 어려운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이외의 여러 가지 어려움과 환난에서 능히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이 가까우니 우리 가운데 더 지독한 환난이 전개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것이 그림처럼 느껴질 것이고, 또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극약과 같은 고통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환난이 시대를 지내야 할까요? 네. 전자와 같이 지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을 바라보며, 또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에 감사하며, 그 은총을 늘 되새김질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동으로 충만될 때 우리는 능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의 주가 되시는 예수를 따라 하나님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게 됩니다. 최후의 승리를 얻을 때까지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에 대한 감동이 늘 여러분들 가운데 항상 넘치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동을 잃게 된 사람은 언제나 과거의 옛된 생활로 돌아가려는 습성이 발동되기 때문에 옛 생활로 돌아가게 됩니다.
마태복음 12:43-45의 말씀은 이러한 생활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잘 설명해 주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 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은혜의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마귀의 역사가 얼마나 더 강하게 우리 자신들을 제압하는지를 일러주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되는 것이 영적 원리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잃고 옛된 생활이 편하고 좋다하여 돌아가게 된다면 분명 그는 과거보다 더 죄악된 생활에 빠져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위기에 내몰렸을 때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눈이 먼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위기를 결코 위기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위기를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시는 축복의 기회라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사와 감동을 잃고, 또 하나님과의 밀접했던 은혜의 관계가 식어 원망과 불평을 일삼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가 과거의 죄된 생활보다 더 심한 타락의 생활로 돌아가게 됩니다.
만약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로와 애굽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저들에게 놓여질까요?
그것은 죽음과 혹독한 형벌과 노역일 뿐입니다. 저들이 과거로 돌아갔을 때 저들에게 유익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 혹독하고 극심한 속박과 억압 그리고 비참한 현실들이 저들을 맞이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죽으나 사나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구원의 은총을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들 앞에 있는 현실이 공포스러운 홍해와 죽음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운 인도하심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날마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에 대한 감사를 소가 우사에서 낮에 초원에서 뜯어먹었던 풀을 되새김질 하듯 되새김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옛되고 죄된 습성으로 돌라가려는 우리의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에 대한 감사와 감동이 넘칠 때, 우리가 가지고 있던 육신의 욕망이 죽어갑니다. 또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에 대한 찬송이 불려질 때, 옛된 생활에 대한 향수가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에 대한 기도의 되새김질을 할 때, 우리 육신에 깊게 뿌리박혀 있던 옛된 습관들이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 바 된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신앙과 삶의 본질은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과 이를 위해 친히 희생제물이 된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들의 본질이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는데, 어째서 그 구원하는 은총에 대한 감동을 잊고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은혜롭고 능력 있는 삶을 살고, 하나님께서 기뻐게 받으시는 예배를 온전히 드릴려면 우리는 늘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에 대한 감동으로 충만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감동이 여러분들과 저의 생활과 심령 가운데 가득할 때 이 어려운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이외의 여러 가지 어려움과 환난에서 능히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이 가까우니 우리 가운데 더 지독한 환난이 전개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것이 그림처럼 느껴질 것이고, 또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극약과 같은 고통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환난이 시대를 지내야 할까요? 네. 전자와 같이 지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을 바라보며, 또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에 감사하며, 그 은총을 늘 되새김질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동으로 충만될 때 우리는 능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의 주가 되시는 예수를 따라 하나님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게 됩니다. 최후의 승리를 얻을 때까지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에 대한 감동이 늘 여러분들 가운데 항상 넘치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행복한교회 최정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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