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을 회복하는 길

12월 22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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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을 회복하는 길

   

2008.12.06 16:19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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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을 회복하는 길 (막 3:1-6)

이 시간에 “능력을 회복하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황해도 안악골의 호랑이요 망나니로 통했던 김익두가 회개하고 변화된 후 전도사 때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심방 길에 김전도사는 앉은뱅이 거지를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앉은뱅이를 고쳐보겠다고 사람이 없는 과수원 돌담 밑으로 거지를 업고 가 외쳤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이름으로 일어나라" 그리고 손을 잡고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나음이 없었고 도리어 거지에게 미쳤다는 소리만 듣고 급히 도망쳐 나왔습니다.

너무나 부끄러운 김전도사는 산으로 올라가 금식과 철야를 하며 능력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불같은 성령이 그에게 임했고 산을 내려온 김전도사는 그 앉은뱅이를 다시 만나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앉은뱅이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김익두 목사의 첫 번째 기적이었고 그 후 2만여 명의 난치병 환자들을 안수로서 고쳤으며 280여개의 교회를 세웠고 200여명의 신학생들을 공부시켰습니다.

이처럼 기독교 역사 속에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많은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신비한 이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만의 특별한 은사는 아닙니다. 막16:17-18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메마른 능력이 회복함을 입어야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손 마른 자를 고쳐주신 이야기인데 바로 그 진리를 우리에게 잘 가르쳐줍니다.

그럼 메마른 능력을 회복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1. 영의 병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1절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여기 한편 손 마른 사람에 대해서 기독교 초기의 여러 문헌에는 그가 석공이었다고 합니다. 눅6:6에는 오른손 마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힘의 근원이며 노동력의 근원인 오른손이 말랐으니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언제부터 말랐느냐? 이 사람의 손이 마른 상태를 가리키는 헬라어 ‘엑세람메넨’이 완료 수동태 분사로서 그의 손 마른 것이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임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질병 때문입니다. 팔을 많이 쓰는 석공의 손이 병들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오른손은 권능의 상징인데 그 귀중한 손이 병들어 마르고 만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에 병이 들면 영적 능력을 잃게 됩니다. 불신도 의심도 병입니다. 게으름과 나태도 병입니다. 염려와 근심도 병입니다. 미움과 증오도 병입니다. 교만도 욕심도 병입니다. 범죄와 상처도 병입니다. 소리가 약해지고 열심을 잃은 것도 병입니다. 다 영적 기운을 막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능력이 떨어지면 어디에서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1:18-19)고 경고했습니다. 성경을 붙잡고 바른 믿음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2. 송사하는 세력을 조심해야 합니다.

2절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 이들은 예수님을 고소하려고 흠을 찾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병을 고치면 안식일을 범한 것으로 고소하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중심보다 형식과 외식에 치우친 사람들입니다. 율법의 중심을 알지 못하니 바로 행치 못할 뿐 아니라 바로 행하는 것도 범법으로 고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송사하는 세력을 이기지 못했다면 치료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송사하는 자가 누굽니까? 우리의 양심이기도 하고 이 양심을 이용하여 참소하는 사단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양심이 잘못되면 안 됩니다. 양심은 율법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양심이 너무 예민하면 죄 아닌 것도 죄로 인식하여 정죄에 빠지고 양심이 너무 둔해도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해 범죄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덧붙여 복음적인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복음적 양심이란 정죄 받아 마땅한 죄인이지만 예수님의 속죄 공로 힘입어 죄 사함 받았다는 확신입니다. 보혈공로를 믿어 나를 정죄하지 않고 용서와 자유를 누리는 양심이어야 합니다. 나는 죄인이라는 끝없는 참소를 받아들이는 한 우리는 능력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보혈을 믿는다.'는 믿음으로 나가세요. 그러므로 무엇보다 보혈의 기초가 잘 놓여 져야 합니다.

3. 항상 예수를 시인해야 합니다.

3절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손 마른 사람은 회당의 사람들 틈에 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일어섰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자리 한 가운데에 섰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안식일이 무엇인지 사람 앞에 공개적으로 가르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은 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에게 일어서라 하셨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 같으면 "이러서라 했다가 낫지 않으면 어쩌지?" 하며 용기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일어서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손 마른 사람은 일어섰습니다. 이 역시 믿음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예수님, 이목이 두렵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저까지 핍박할 거예요. 고쳐 주시려거든 저 편으로 불러 아무도 모르게 고쳐주시지요.” 그랬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에 순종하여 회중 가운데 섰습니다. 이래야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적에 있어서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33) 하셨습니다. 우리는 말로 시인하고 행동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말하고 기도하는 것과 아무 말 없이 기도하는 것과 차이가 큽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을 선포하고 설교해 보세요. 더욱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김익두 전도사가 앉은뱅이 거지를 몰래 데려다가 기도한 것이 문제였어요. 그렇게 기도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로 안개를 물리친 조지 뮐러의 이야기가 있지요. 짙은 안개로 배가 출항하지 못해 22시간 동안 꼼짝 못하고 정박해 있는데 누가 선장의 어께를 가볍게 두드렸습니다. 조지 뮐러였습니다. "선장, 나는 토요일 오후까지는 퀴벡에 도착해야 하오" 그 때 선장은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러자 “좋소, 당신의 배가 나를 태워다 줄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다른 방법을 강구해 주실 것이오. 나는 지금까지 75년 동안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소.” 그러면서 선장을 해도실로 데리고 내려가 기도했습니다. 선장은 '이 사람은 돌아도 단단히 돌았군.' 하며 냉소했습니다. 그러나 뮐러의 짤막한 기도한 마디에 그 짙은 안개는 말끔히 걷혔습니다. 이것을 본 선장의 믿음이 크게 변화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능력이 충만해도 입으로 행동으로 시인하지 않으면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4. 얽매이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4절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예수님은 그들에게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생명이 위독한 경우 외에는 안식을 범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을 알기에 그들은 주님의 질문이 옳은 줄 알면서도 서로를 의식하느라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생명 뿐 아니라 안식일에 선행하는 것도 옳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손 마른 자는 위독한 환자는 아닐지라도 안식일에 고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주일날 강단에서 치유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주일예배에 무슨 통성기도냐 무슨 치유기도냐 한다면 그것은 바리새인입니다. 꼭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병인들에게 진정한 안식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때문에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 주일 때문에 자유함을 얻지 못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의 의미는 사랑인데 안식일 때문에 더 고통당한다면 안식일 제정의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전통과 제도 체면 습관 때문에 심령이 억압 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마음의 나약과 게으름도 믿음을 억압합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고 싶어도 얽매이는 제약이 많습니다. 꼭 이기시기 바랍니다. 춤추는 다윗을 업신여긴 미갈은 일생 자식이 없었습니다(삼하6:23). 열매가 없다는 말입니다.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 꼭 춤을 추자는 말이 아니라 무엇에 얽매여 활발한 신앙생활이 제약을 받지 말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제도만 고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날마다 경배하는 삶이 끊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5. 남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5절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말라비틀어진 손이었지만 주님의 말씀대로 내밀었더니 회복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주시는 교훈은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봉사하면 남도 살리고 나도 풍족해집니다. 기도로 섬겨보세요. 내 영혼에 성령이 충만해집니다. 봉사로 섬겨 보세요. 나에게도 건강과 기쁨이 넘칩니다. 물질로 섬겨 보세요. 주면 또 생기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은사로 섬기고 직분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사는 길이요 모두가 사는 길입니다.

그러나 나만을 위해 힘쓰면 나 쓰기도 모자랍니다. 산을 넘다 얼어 죽은 사람을 보고 혼자 살겠다고 앞서 가던 사람은 죽고 그를 업고 가던 썬다씽은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그런데 썬다씽만 아니라 죽은 사람도 추위가 풀려 살아났습니다. 주면 생기고 주면 살고 주면 넘치는 것이 복음입니다. 오병이어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지금 어려울 때일수록 있는 사람들이 지갑을 열고 써야 합니다. 그래야 함께 살지 지갑을 닫으면 없는 사람은 물론 있는 사람도 망하고야 말기 때문입니다. 손을 내미는 것이 회복의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성령과 능력이 충만하셨습니다. 주님은 항상 손을 내밀어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은혜로 성령과 은혜가 충만해야 하겠습니다. 어디서 메말랐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말씀과 회개로서 믿음의 병 다 고치고 보혈공로 안에서 주님을 시인하며 얽매임 없이 남을 위해 봉사하며 언제나 활발하게 믿음 생활 잘하여 하나님의 오른팔의 권능이 여러분에게 충만히 나타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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