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돈이 많은 백만장자가 신문에다가 이런 광고를 실은 일이 있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삶에 대해서 진실로 만족하다고 하고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에게 제가 백만불을 드리겠습니다. 라고 했더랍니다.
정해진 날짜가 되자 수많은 사람들 수백 명의 지원자가 모여들었습니다. 저마다 자기는 만족하고 자기는 스스로 행복하다가 자기 행복한 내용을 설명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직업에 대해서 만족하다고 어떤 사람은 자기가 받는 보수가 그리 많지 않지만은 자기는 받는 보수에 대해서 스스로 항상 만족하게 생각하게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고 산다고. 또 어떤 사람은 아내에게 만족하고, 어떤 사람은 남편에게, 혹은 자녀들에게 만족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 취미 생활이 너무 좋아서 여기에 만족함을 느끼며 산다. 그랬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더랍니다. 저는 불평하고 싶어도 불평할 꺼리가 없어서 걱정입니다. 이런 괴변도 있었답니다. 계속 열심히 자기 나름대로 행복과 만족을 발표했지만 어느 사람의 설명도 납득할 만한 것이 못돼서 결국은 백만불 상금은 아무도 받지 못했답니다. 그 왜 그랬냐? 하면은 이 주인공 되는 이 광고주가 단 한마디의 질문을 했는데 이 질문 앞에 모두가 무릎을 꿇었기 때문입니다.
그 질문은 이렇습니다. 당신들은 진실로 당신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고 한다면 내 돈 백만불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까? 이 말에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참 행복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더 바랄 것이 없어야 행복입니다. 아직도 돈 백만불이 필요하거든요. 아직도 또 어떻게 되길 바라는 게 있죠. 기대가 있고 바라는 것이 있는 동안은 엄격히
말하면 행복은 아닙니다. 이대로 이 형편 이대로 이 모습 이대로 만족해야 그것이 행복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참 행복이라는 것은 그 행복한 순간에 내 모든 소원을 다 이루고 만 것입니다. 다시 다른 소원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야 행복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최고의 만족을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예수께 받은 사명 은혜에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아니하노라.”바로 여기에 행복에 극치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7절에 보면은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 믿음과 재물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하리라. 관제로 드릴찌라도 기뻐하리라.” 관제라 함은 피를 쏟아 붓는단 소립니다. 양을 잡아서 선지피가 솟아오를 때 그것을 양동이에 받아다가 제단에 붓습니다.
그와 같이 내가 이 시간에 죽어서 비참하게 죽어 피를 쏟아 부어도 나는 행복할 것이다. 이런 행복이 진짜 행복입니다.
우리가 성탄이 될 때마다 듣게 되는 곡이 있습니다. 이 메시아를 작곡한 헨델은 원래 오르가니스트요 그는 오르간 연주자로서도 탁월했다고 합니다. 언젠가 그가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하고 크게 환호를 하고, 큰 칭찬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의 연주는 두 다리와 열 손가락만 가지고는 모자라는 연주 같은데 이렇게 연주를 잘하게 되는 비결이 뭡니까?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을 때 내 마음과 생각과 힘과 목숨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 여기서 죽어도 좋다하는 마음으로 연주합니다. 그래서 감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온 정력과 생명을 다하는 순간순간 다하는 바로 거기에 행복의 극치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 어떤 일을 위해서 이렇게 해본 일이 있습니까? 이 일을 위해서라면 이대로 죽어도 좋다. 하는 그런 마음으로 온 정력을 다 쏟는다면 그야말로 행복한 것이지요. 이런 경험을 한번도 못하고 죽으니 불쌍한 사람이지요. 이런 경험을 한번만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그는 세상을 헛되이 산 게 아니죠. 사람이 이 극단적인 감정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 표현에 있어서 생명과 연결해서 표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스우면 우스워 죽겠다. 맛이 있어도 맛있어 죽겠다. 졸려 죽겠다. 피곤해 죽겠다. 좋아서 죽겠다. 뭐 죽겠다는 말을 곧 잘 합니다. 이럴 때에 흔히들 생각하기를 아 이거 한국사람들은 궁상맞아서 걸핏하면 죽겠다고 한다고 하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고 세계 어느 나라말도 마찬가지요. 사람은 원래가 죽고 싶은 본능과 살고 싶은 본능이 함께 있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나라말이든지 이걸 전문으로 연구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언제나 극단적 감정 표현은 죽음과 관련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행복에 대해서 죽어도 좋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 한이 없다. 또 죽어도 행복하다. 죽음과 관련해서 연관해서 표현하기 마련입니다. 그런고로 극치적 표현이라는 것은 이대로 죽어도 만족하다. 바로 거기에 행복의 절정이 있다는 말씀이올시다.
사도 바울은 정말로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는 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의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아무리 자기를 위해 살려고 해도 살길이 없어요. 부득불 남을 위해 살고 남을 위해 죽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누구를 위해 사는 겁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때로 부모님들 가운데는 참 우리 어머니들 가운데 이런 분들 많아요. 자식을 위해 살지. 자식을 위해 정성을 다하다가 마지막에 그 아이들이 크면서 집을 나가버리면은 나는 인생을 헛살았다. 뭐 그러더만요. 그건 처음부터 잘못 산 거예요. 세상에 났다가 그래 자식하나 낳아서 그거 키우자고 살았나? 그건 아니예요. 근데 어떤 부모가 이런 얘길 하는 걸 들었어요.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는데 피아노를 잘해요. 뭐 입상도 하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얘를 데리고 외국에 가서 여기에 있는 살림을 다 때려치우고 외국 가서 얘 하나 공부시키면서 우리 둘이는 돈 벌어서 이 치닥거리하고 훌륭한 피아니스트를 만들어 보겠다고 저한테 와서 그럽디다요.
제가 대답을 이렇게 했습니다. 그래 얘가 피아니스트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될른지 못 될른지 그것도 모르겠지만 설사 됐다 치더라도 그래 하나님 앞에 가서 너는 참 너 딸하나 낳아서 잘 키우고 왔구나 그럴 것 같냐고 어떻게 딸 하나를 위해서 일생을 살아야 되느냐고 어떻게 그게 목적이 되겠느냐고 자식을 키우지만 자식은 목적이 아닙니다. 그래 되면 우상이 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목적될 만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뚜렷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를 위해 죽었다가 부활하신 바로 그 분이 내 생의 목적이요. 누구를 위하여 살고 누구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했어요. 삶에 목적도 분명하고 죽어야 할 이유도 언제나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아깝지 않게 살았습니다. 온통 다 쏟으면 살았습니다. 그것이 행복한 것이죠. 미련 없이 살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래 그가 간증하는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는 것이 그리스도고 죽는 것도 유익하다. 죽으면 끝난 것인데 아니요. 죽는 것도 유익하다. 이것이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렇게 살았다 그 말입니다. 이 행복한 사람이죠.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살았으니까 뿐만 아니라 목적은 있는데 현실적으로 구체화되지 못한 목적에 실망이 있는 것이예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 놓고는 내가 뭘 해야 될지를 몰라요. 이래 되면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지 않았어요. 여기에 복음을 위하여 특별히
이방인의 사도로써 은혜의 복음을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이방인의 사도 은혜의 복음 이것이 바울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내게 맡겨진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는 갈라디아 1장에서 고백합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입었다. 난 태어날 때부터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태어났다. 분명합니다. 이렇게 확실한 목적이 구체화된 그런 생을 살았어요.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는가를 알고 있었어요. 좀 더 나아가서는 내게 주신 경륜을 알았습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습니다.
복음 전파도 여러 가집니다 만은 여러분 이것을 흔히 세상에서는 일반적으로 적성이라고 교회에서는 은사라고 합니다. 내게 주신 은사가 뭡니까? 나만이 할 수 있는 것, 내게 주신 재주 탈랜트 나로 가능케 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극대화 해나가야 합니다. 가만히 보세요.
음치가 음악공부 하겠다고 그러면 되겠어요. 죽을 때까지 해도 안 되는 거지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한평생 뭐 피아노를 치고 음악을 한다고 해도 그래도 이게 탁월한 사람이 되야지 돼요. 도대체가 타고나야 되요. 제가 프엔치에 갔을 때에 그 정명우씨가 오페라를 지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앙이 좋은 분이요. 시작하기 전에 들어오라고 해서 준비실에 가서 기도를 하고 끝난 다음에 또 마치고 기도를 했는데 온몸이 땀으로 젖었는데 굉장합니다. 제가 거기서 지휘하는 걸 봤는데 두 사간 반을 내리하는데 거의 악보를 한번도 안 봐요. 열렬히 지휘를 하는데요 난 뭐 음악은 잘 모르겠고 지휘만 보면서 감동을 했습니다.
그랬는데 제가 그 물어보았어요. 여기다 생을 다 기울였어요. 어떤 분이 말하기를 그 분이 유명한 것은 악보를 외우는 거래요. 그 큰 악보를 몽땅 외워 가지고 연습 시간에도 딱딱 지적하는데 외국 사람 그 코 큰 자존심 강한 사람들이 꼼짝을 못한다고 그래요. 그렇지요.
얼마나 성의를 다하는데 그래 저는 여기 나와서 독창하는 사람들 뭐 들고 하면 영 들을 마음 없어요. 뭐 그걸 뭐 그럴려면 그만두지 그걸 그러바에야 되겠어요. 좀 성의를 기울여야지 하다 못해 정 건망증이 있으면 손바닥에라도 써 가지고 나와야지 그걸 큰 악보를 들고 노래를 하겠다고 그래. 그건 청중기만이요. 안 그렇습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저는 어떤 때 보면 언젠가 한 번 누가 음악회 오라고 그래요. 갔지요. 들어보니까 시원치 않아요. 그 다음에 자꾸 또 오라고 그래요. 안가요. 제가 피차가 고생이요. 들어주자니 힘들고요. 이거야말로 타고나야 됩니다요. 하나님이 그쪽으로 은사를 주셔야해요. 내게 주신 은사가 뭡니까? 그걸 정확하게 알아 가지고 여기다가 온 정력을 쏟아야 돼요. 충성이란? 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요. 없는 재주를 부릴려고 한평생 몸부림 쳐봤댔자 되는건 아무것도 없이 절망 뿐이요. 많은 사람 고생시킵니다. 자 조용히 남에게 주신 은사 부러워 할 것 없어요. 나는 나대로 나에게 주신 훌륭한 것이 있어요. 그것을 극대화해 나가는데 사도바울은 바로 그것이예요.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 무엇인가? 이걸 잘 알고 있어요. 그것에 총력을 기울였어요. 행복한 사람이요. 그뿐 아니라 어떻게 해야 되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오늘 본문에도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이끌리어 예루살렘으로 가노라. 그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은 주의 뜻이면 가고, 주의 뜻이면 오리라. 아주 겸손한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사, 특별히 성령의 역사 앞에 그는 순리적으로 살았습니다. 닫힌 문을 열어달라고 몸부림치지 않았습니다. 안될 것을 되게 해 달라고 몸부림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는 대로 겸손하게 따라갔습니다. 그곳이 어디든 감옥이든 그곳이 사막이든 그곳이 어디든 그는 성령의 역사 앞에 조용히 순종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런고로 행복합니다. 여러분 대개 보면 고집이 많은 사람, 제멋대로 하는 사람이 절망합니다. 온유하여 순종하는 사람은 늘 마음에 여유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바울은 끝낼 것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제쯤은 하나님이 내 일을 끝내려고 하시는구나. 그래서 이 복음 전하는 사역 이 사명을 이제 마치려 함에 다 마칠 때가 왔어요. 결론을 지을 때가 왔는데 이때에 나는 내 생명을 조금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헌신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일은 시작하기도 힘들지만 끝내는 게 힘듭니다. 여러분 이 제가 지금 설교하고 있습니다 만은 설교나 강연도요 웅변하기나 강연 다 보면 어떤 말로 시작하느냐 참 어렵구요. 어떤 말로 끝내느냐 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여러분 혹 부부싸움 해봤어요. 시작은 어떻게 했던 간에 이제 끝을 내긴 내야겠는데 끝을 내고 자야겠는데 무슨 말로 끝을 내나. 이게 어렵다고요. 감정이 격해지니까 말은 끝은 내긴 내야겠는데 끝낸다는게 어려워요.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끝을 내야죠. 로마서 13장 11절에 보면 이 시기를 알거니와 이시기, 어느 시점에서 생각해야 되느냐. 이 카이로스가 중요하고 그 다음에는 시편 90편 12절에 보면은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내가 지금 몇 살입니까? 여러분 나이가 얼맙니까? 거기에 걸 맞는 생각을 해야됩니다. 젊은 사람이 늙은 척 하면 그것도 잘못된 것이고, 늙은 사람이 젊은 사람들 하는 거 하겠다고 하면 주책이예요. 그걸 알아야 해요. 어느 책에 보니까 운동도 운동 안 해서 병든 사람도 많지만은 적절하지 않은 운동을 죽은 사람도 많데요. 그렇습니다. 제가 너무 일찍 목사가 됐기 때문에 언제 한번 결혼주례를 하는데 나보다 나이 더 많은 사람을 주례했습니다. 그랬는데 이 사람이 언젠가 한번 시카고에서 만났는데 자기가 요새 정구를 친다고 그래요. 잘 친다고 젊은 사람들하고 해서 내가 이긴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그거 조심하라고 격한 운동인데 그런 말을 하고 돌아왔는데 몇 일 있다고 소식이 왔는데 죽었다고 그래요. 정구 치다 죽었어요. 격한 운동입니다. 영국에서는 나이 50이 넘으면 정구를 법적으로 못 치게 한답니다.
우리나라에 영화배우 제가 이름은 대지 않겠습니다 마는 뭐 친구들하고 축구하다가 죽었잖아요. 아시죠?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에요. 나이든 사람이 뭐 기분 낸다고 축구한다고 뛰다가 아이쿠 하고 죽었어요. 그러니까 나이에 걸 맞는 일을 해야죠. 나이에 맞는 생각 나이에 맞는 행동 나이에 맞는 믿음 나이에 적합한 일을 해야 돼요. 이제는 생을 정리할 때에요. 이제 또 일을 늘어놓아서는 안돼요. 이제는 줄여서 나는 이제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가 남은 시간에 그것이 지혜란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내 전도 사업을 마치려 함에 나는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겸손과 눈물과 인내와 용기로 하나님의 말씀을 최선을 다해 전했습니다만은 이제 달려갈 길을 다가고 마치려 합니다.
그 순간 그는 자기의 죽음이라고 하는 이 생명보다도 더 귀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물러 가지만은 하나님의 사업은 확장되어야 합니다. 내 개인의 일은 끝나지만은 하나님의 일은 더 크게 역사 될 것이예요. 그는 모든 욕망을 다 버리고 평안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모든 기대감마저 하나님께 바쳐버렸습니다. 어떻게 됐으면 좋겠다. 무엇이 됐으면 좋겠다. 그런 욕망도 없습니다. 이제는 끝나는 시간이기에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서 나아감에 그의 모든 생각과 판단력과 자기의 의지까지 다 포기해 버렸습니다. 생명을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않는다. 그는 이미 정신적으로는 하나님께 생명을 완전히 바쳐 버렸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용기의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더 위대한 여유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계획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는 되로 예루살렘에 가면 가고 로마로 가면 가고 감옥으로 가면 감옥으로 가고 순교의 죽음이 다가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순교하고 그럴 생각이에요. 하나님께 이미 깨끗하게 헌신해 버렸습니다. 시작이 중요하지만은 끝이 더 중요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일단 끝을 맺고 모든 전도사업과 계획을 일단 끝을 맺고 생명을 하나님께 바치고 남을 생을 삽니다. 며칠을 살던 어떻게 되던 빈부귀천간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명까지 바쳤으니까 내 주여 인도하는 되로 어디서 죽던 주님 하시는데로 하시옵소서. 그렇게 남은 시간을 살았더란 말입니다. 이미 바쳤고 그리고 남은 시간을 살았습니다.
세계 2차대전 당시의 포로생활을 했던 한 영국 장교의 유고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1945년 4월 8일 주일아침에 본훼퍼 목사님 독일 복음주의 교회목사님은 지금 감옥에 갇혀있는데 그 날 아침에 아침예배도 마치기전에 우락부락하게 생긴 독일군인 둘이 찾아와서 죄수 본훼퍼 우리를 따라와 그러더랍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이제 형장으로 나가는 길입니다. 그 때의 바로 그 영국군인 포로 된 군인하나가 말하기를 “목사님 이것이 마지막이군요. 안녕히 가십시오.”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본훼퍼 목사님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이것이 끝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는 이것은 내 생명의 시작입니다. 감옥생활은 끝났습니다. 내 자유의 생활이 시작됩니다. 세상 고통스러운 생은 여기서 끝납니다.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간증하며 형장으로 나갔습니다. 여러분 미래가 암담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맡깁시다. 잘살고 못살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오래 살고 짧게 살고 건강하거나 병들거나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다만 주님의 뜻이 이루어 지이다. 깨끗하게 헌신하고 생명을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않고 바쳐버리고 오직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고 덤으로 이제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창조적 역사가 있고 새로운 용기가 함께 하는 것이올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