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원조로 통상 최초 한국인 목사 7명 중에 한 분인 길선주 목사를 꼽는다. 그가 조사(助事:우리나라 초기 장로교에서 목사와 선교사를 돕던 교직)로 섬기던 장대현장로교회에서 규칙적으로 새벽기도회를 시작한 것은 1906년이다.
1907년 초대한국교회가 대부흥을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새벽기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초대교회 성도들은 망국의 슬픔을 가슴에 안고 이른 아침부터 하나님 앞에 나아가 눈물을 뿌리며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교회의 새벽기도는 예수님의 새벽기도를 이어가는 아름다운 전통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60-70년대를 거치면서 새벽기도가 본래의 의미와 목적에서 빗나가 이기적인 성공과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적 수단으로 전락하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경제성장과 함께 영적 가난함과 갈급함을 상실해가며 새벽기도에 대한 열정이 식기 시작하였다. 이와 더불어 한국교회 성장도 전체적으로 둔화되거나 멈추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몇몇 교회에서 새벽기도회의 부흥이 다시 일기 시작했다. 김삼환 목사의 명성교회와 전병욱 목사의 삼일교회가 잘 알려진 예이다. 가장 최근에는 옥한흠 목사에 이어 사랑의교회에 부임한 오정현 목사가 40일 특별새벽기도회를 열어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
제자훈련의 강점과 성령사역의 강점을 접목시키려는 몸부림을 엿보게 된다. 특별새벽기도회를 뜻하는 `특새`라는 단어가 보편화되어 가는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다시 한번 새벽기도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청하고 있다.
새벽은 특별한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벽 혹은 아침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나 제사를 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시 5:3; 46:5). 새벽기도와 찬양이 잠들어 있는 역사의 새벽을 깨우는 길임을 확신하였다(시 57:8; 108:2). 한편 그들은 아침에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며 그의 말씀을 듣기를 갈망하였다(시 90:14; 92:1; 143:8). 예수님도 이런 전통을 자연스럽게 이어가셨음을 마가는 암시하고 있다(막 1:35).
새벽은 어둠이 물러나고 빛이 임함으로써 하루가 새롭게 열리는 첫 시간이다. 이 시간을 제일 먼저 하나님께 드려 기도와 찬양 그리고 말씀묵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은 하나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시는 아름다운 신앙고백일 뿐 아니라 새 하루에 대한 너무나 훌륭한 준비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볼 때 새벽기도회에 대한 강조가 새로워지고 있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고 감사한 일이다. 새벽기도회를 통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삶의 습관을 격려함으로 한국사회의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밤 문화 확산에 제동을 걸자는 의도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새벽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형식적 율법주의의 올무에 걸려 자기의(自己義)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한다. 한편 단순한 농경사회와는 달리 복잡하게 분업화된 산업사회에서는 특정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새벽기도회가 너무나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잘 배려해서 그들이 부당하게 상처를 입거나 소외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
사랑의 교회 특별새벽기도회 형식과 분위기는 사랑의 교회 성도 자신들에게도 25년만에 처음 맛보는 신선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고요와 격정이라는 감성의 곡선을 자연스럽게 그려가며 오랜 시간 이어져 가는 찬양과 기도 그리고 순수하고 아름답게 들려지는 방언기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당위인가?
성경은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과 도우심을 기다리는 침묵기도(시 62:1, 5)와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놓으며 울부짖는 기도 모두를 소중히 여긴다(시 22:2, 5). 그러므로 어떤 한 형태의 기도를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통성기도에만 익숙한 사람은 침묵기도를, 침묵기도에만 익숙한 사람은 통성기도를 배워나가는 겸손과 아량이 필요하다.
방언기도도 간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하면 된다. 강요하거나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영적 교만과 자기중심적 태도 때문에 나의 방언이 다른 사람에게 시험거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편 방언기도하는 사람을 무조건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편견도 버려야 한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형식이 아니라 그 의미를 깊이 깨닫고 기도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 마음과 필요를 미리 다 아신다. 그럼에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우리가 먼저 기도하기 전엔 하나님께서 움직이시지 않는다.
간절한 기도를 통해 우리가 더욱 겸손해지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깊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암울한 한국교회와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며 우리를 간절한 기도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진정한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께 떠넘겨버리는 무책임한 행위가 아니다.
우리가 책임을 다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며 우리가 도저히 실현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대신 감당해주실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를 깨닫고 눈물로 하나님께 나아가 온 몸과 마음을 던져 울부짖는 주의 종이 있는 한 아무리 시대가 어둡더라도 하나님은 그를 통해 반드시 새 역사의 길을 여시고야 말 것이다. 사랑의교회 특새를 계기로 통절한 기도의 열기가 한반도를 뒤덮기를 바라는 마음 그래서 더욱 간절해진다.
무엇을 위해 기도할 것인가?
이번 사랑의교회 특새주제는 `부모의 새벽기도, 자녀의 평생축복`이고 토요일은 `3대가 은혜 받는 특별기도회`로 모였다. 이것만 볼 때 기복적 가족주의 흐름에 너무 편승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갖게 한다.
그러나 부분별로 제시된 기도제목과 실질적인 기도회 내용을 검토해보면 균형을 잡아보려고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현재의 균형점에 머물지 않고 좀더 깊은 수준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시인이 새벽을 깨우겠다며 드린 기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 57:11). 시인은 온 세상 구석구석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어 그 영광이 드러남으로 역사의 새벽이 열리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과 가정, 그리고 교회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억압과 고통으로 얼룩진 온 세상을 몸과 가슴으로 끌어안아야 한다. 그 슬픈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로운 뜻이 펼쳐지기를 눈물을 뿌리며 기도해야 한다. 진정으로 새벽을 깨우는 기도를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