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종류의 신앙

창 8:1-12절 (까마귀와 비둘기)
노아 때 홍수 심판이 끝난 후 노아가 방주에서 이 땅에 물이 얼마나 줄어들었는가를 알기 위해서 까마귀와 비둘기를 밖으로 내보낸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여기 두 종류의 새는 공중을 나는 새들이지만 빛깔이나 모양, 식성, 성품까지도 서로 상반된 점이 많다. 바로 이 두 종류의 새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말세에 나타날 두 종류의 신앙인에 대해서 모형으로 교훈한다 하겠다. 노아가 먼저 까마귀를 창 밖으로 내 보냈는데 까마귀는 아직 거듭나지 못한 육에 속한 신자를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비둘기는 성령받은 영에 속한 성도의 모형으로서 교훈해주고 있다.
육에 속한 신자는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신자를 말한다. 그리고 영에 속한 신자는 주님의 품을 떠나지 않고 주님 안에서 살고 있는 성도들의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까마귀를 비유한 신자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를 구원받은 놀라운 은혜를 보답하기는커녕 배은망덕한 배신자의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비둘기를 모형한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줄 아는 보은자라 하겠다. 말세에는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낼 때요,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때임을 알아야 한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여지는 때라고 계22:11절은 말씀하고 있다. 또한 말세에는 은혜를 배반하고 감사를 잃어버린 때이기 때문에 큰 고통을 당하는 때임을 딤후 3:1-2절은 말씀하고 있다.
첫째 우리는 노아가 두 새를 창밖으로 내보냈다고 했다.
노아가 방주 안에 거한지가 벌써 1년이 넘었다. 노아가 600세에 방주 안에 들어갔으며, 그 다음 해인 601년 정월에 방주에서 나왔음 봅니다. (창7:6, 8:13). 노아가 방주 안에 있는 동안은 해와 달과 별을 볼 수 없이 모든 짐승들과 함께 해온 그 기간은 아마도 고통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하루속히 방주 안에서 밖의 세상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의 물결에 온 천하가 완전히 들어나지 않았기에 방주 안에서 밖의 세상을 볼 수 없는 형편이었다. 물은 150일 동안 땅에 가득하였으며, 방주는 이곳저곳으로 요동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이제 하나님은 노아와 함께 하고 있는 모든 들짐승들과 육축을 권념하고 바람을 불게 하자 온 땅을 덮고 출렁거리던 물이 점점 줄어가고 있다. 이제는 하늘의 창이 닫히고, 비가 그치고 물은 땅에서 물러가고, 150일 후에 방주는 다시 아라랏산에 머물게 되었으며, 산들마다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때 노아는 방주 안에서 나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 물이 얼마나 남았을까 해서 이를 알아보기 위하여 먼저 까마귀를 창을 열고 날려 보냅니다.(창 8:7), 노아가 주님의 모형이라고 했을 때, 주님은 구원받은 우리를 땅에서 번성하며, 생육하고,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둘째 까마귀와 비둘기를 밖으로 내보낸 시기를 봅니다.
1) 하나님이 노아를 권념하실 때이다.
‘권념’이란 생각하셨다는 말씀을 가리킨다. 방주 안에 있는 노아를 주님은 항상 보호하여 주셨지만, 이제는 방주 안에서 나오게 하고 무지게 언약을 주시기 위한 그 때를 하나님은 생각하셨을 것으로 본다. 창19:29절에 하나님께서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하는 성을 불로 심판하실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시고, 롯을 심판하시는 중에도 내 보내셔서 보호하십니다. 출2:24절에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으니, 하나님의 권념의 시기는 그 언약을 기억하는 때임을 알 수 있다.
2) 바람이 땅 위에 불 때이다.
요 3:8,행 2:2절에서 바람은 성령을 상징하고 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권념하고 위로하십니다. 롯의 때는 천사가 나타나서 재촉하였고, 지체하는 그들을 성 밖으로 이끌어내셨음을 봅니다.(창 19:15,16). 태초에 천지 창조 때에는 수면에 운행하시면서 만물을 회복하는 역사를 하셨다. 에스겔 골자기의 해골 떼들에게는 생기의 성령으로 역사하시고 큰 군대를 이루었음을 봅니다. (겔 37:5-6). 지금은 성령께서 보해사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고, 권념하고 계십니다(요 16:7 - 8).
3) 두 새를 내보낸 시기는 물이 땅에서 감한 때이다.
물이 불어나는 역사는 죽이는 역사요, 물이 감하는 역사는 살리는 역사이다. 물이 불어날 때는 4단계로 늘어났으며, 물이 감한 때는 5단계로 줄어들었다. 살리는 역사는 죽이는 역사보다 1단계 더하였다. 사망 권세는 언제나 생명 권에게 삼켜지는 법이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진노와 심판보다 훨씬 우월하다. 그러므로 노아시대 홍수 심판 후 하나님은 중심에 이르시되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으시기로 작정하시고(창 8:21). 그 아들 독생자를 보내어(무지개 언약) 세상을 구원하실 것을 계획하신 것입니다.
◎ 물이 4단계로 불어난 것은(창 7:17-23)
① 물이 많아지는 단계=>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으며,
② 물이 더 많아진 단계=> 방주가 물에 떠다녔고,
③ 물이 다욱 창일한 단계=> 높은 언덕이 다 덮였고,
④ 물이 15규빗 불어나는 단계=> 산봉우리가 덮혔다.(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들이 다 죽었 다).
◎ 물이 5단계로 줄어듬(창 8:1- 5).
① 물이 감한 1단계=> 깊은 샘들과 하늘들의 창들이 막혔다.
② 물이 감한 2단계=> 비가 그쳤다.
③ 물이 감한 3단계=>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④ 물이 감한 4단계=>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다.
⑤ 물이 감한 5단계=> 산들의 높은 봉우리가 보였다.
하나님이 권념하시는 성령의 바람이 불어올 때, 구멍은 막히고, 진노는 그치고 시험은 물러가고, 축복은 머물고(안정상태), 소망은 보인다. 150일 동안 땅에 물이 창일하였기에 방주는 이리저리 요동하여 안정이 없고, 온 천하는 모두 물에 덮혀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방주가 산 위에 머물렀으며 원 위치 회복의 안정 상태요, 소망의 높은 산들이 보이게 된 것이다. 할렐루야!
4) 바람이 불 때 물이 감해졌다.
오순절 성령 이른 비바람은 3천명, 5천명 수가 늘어났지만, 마지막 추수기 때 바람에는 알곡은 줄어든다. 참깨 단을 묶어서 매를 들어 때리고, 키로 치고, 바람에 날리면 껍질은 늘어나고 참깨는 줄어듭니다. 콩 타작을 하든지 깨 타작을 하든지 때리면 때릴수록 쭉정이는 많아지고 알곡은 적습니다. 그리고 알곡 중에서 다음 해에 쓸 씨앗을 골라내면 알곡은 더 줄어든다. 이와 같이 천년왕국 종족백성은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이스라엘 60만명 중 2명이요, 기드온 군사모집에서 3만 2천명에서 1만 명으로 줄어들었으며, 1만 명에서 3백명으로 줄어들었다. 마지막 때도 온 인류가 땅에서 삼분지 2가 멸절되고, 삼분지 일은 불가운데 던져져서 금이나 은같이 시험하신다고(슥 13:8) 하셨다.
셋째 두 종류의 신앙인은 어떤 자들인가?
1) 까마귀 속성의 신자가 있다. 이는 육에 속한 자들이다.
까마귀 속성의 신앙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없다. 당시 많은 까마귀들 중 이 까마귀만이 방주 안에서 보호를 받고 살아남은 것이다. 1년이 넘는 동안 방주 안에서 보호를 받고, 사랑을 받고, 양육을 받았다. 앞으로 그는 살아남은 보람을 찾아야 하고, 종족을 번식해야 하고, 자기를 살려준 주인의 은공을 죽을 때까지 잊어서는 안될 것인데, 그러나 까마귀는 방중에서 나오자마자 줄행낭을 치고 말았다.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이는 환난 중에서 살려준 은덕을 망각하고 말았다.
까마귀가 왜 그랬을까요? 땅위에 나와 보니 사방천지가 먹을 것들이 쌓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방주에서의 은덕을 까마득하게 잃어버린 것이다. 온통 천하가 먹을 것들이 쌓여있다. 그래서 방주로 돌아가야 할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까마귀는 해가 질 때가 되면 까악 까악하고 운다는 것이다. 불결하고 부정한 새이다. 성경에는 까마귀와 같은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먹은 에서,(히12:16). 세상을 사랑하여 자기의 스승인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버린 데마(딤후 4:9). 그리고 가룟유다, 사마리아의 아홉 문둥이(눅 17:17), 탐욕에 누이 멀어버린 발람(유 11). 오순절의 은혜의 자리에 동참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행 5:1~9). 여기서 말한 인물들은 모두가 까마귀 족속들이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신으로 자기 인생을 망치고 구원을 포기한 자들이다(갈 3:3). 탐욕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요, 저주의 자식들이다(벧후 2:14). 이 새는 사람의 식물로도, 하나님의 제물로도 사용할 수 없는 부정한 새이다.(레 11:15).
2) 비둘기 속성의 신자들이 있다. 이는 영에 속한 신자들을 말한다.
비둘기는 성령의 상징이다(마 3:16). 정한 시기를 아는 새요, 하나님의 규례를 아는 새다(렘 8:7). 눈에는 눈물이 있고, 평화와 순결을 상징하고 있다. 부부의 우애가 있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다(눅 2:24). 감각이 예민하고 아주 정결한 새이기 때문에 깨끗한 식물을 먹는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신부의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다(아 2:14).
비둘기는 방주로 돌아왔다. 이것은 안식의 복음을 가리킨다. 온 지면에 물이 아직 많기에 접촉할 곳을 찾지 못하고 비둘기는 돌아왔다(창 8:9). 이처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라면 이 세상 그 어느 곳도 접촉할 곳은 없다. 세상은 썩고 냄새뿐인 것이다. 부정하고 부패되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고백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주님을 위하여 지으셨나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은 그것들이 주님 안에 안식처를 찾을 때까지는 불안 하나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방주 안에 돌아온 비둘기처럼 주님의 품안에 안겨질 때만이 참된 안식이 있고, 그곳만이 우리가 평안히 쉴 수 있는 평안의 안식처인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다음으로 비둘기는 좋은 소식을 물고 온 것이다(이는 평화의 복음을 말한다).
노아가 7일을 더 기다린 다음 다시 비둘기를 내 보내었다. 그런데 비둘기는 저녁 때에 방주로 돌아올 때는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를 물고 왔다. 오순절 성령받은 성도들은 입으로 새 방언을 말했다. 성령 받으면 심령변화가 생기고, 심령변화의 증거는 입술에 변화가 생겨야 한다. 시기와 분쟁과 원망과 불평을 말하던 입술이 변하여 감사와 찬송과 새 방언이 나와야 한다. 이렇게 되었을 때 그는 온 세상에 평화의 복음을 전파하는 축복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노아는 비둘기가 물고 온 감람 새 잎사귀를 보고 얼마나 기뻐하고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것은 무슨 좋은 소식이 없을까? 하고 저녁때까지 기다리고 기대했던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것은 지루하지만 만남에는 기쁨이 있는 것이다. 기대했던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는 실망되지만 그 일이 성사되었을 때는 기쁘고 소망이 넘치는 것이다. 이제는 지루했던 심판의 밤은 지나고 평화의 아침이 왔다는 좋은 소식을 안겨 준 것이다. 나와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행위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입으로 증거되고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아름답고 기쁜 소식을 방주 안으로 계속해서 물고 와야 한다 우리 하나님은 이를 여러분에게서 기대하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세상은 썩고 병들고, 냄새나고, 부패했지만 그것은 육의 세계요, 영의 세계는 아니다. 썩은 연못에서 연꽃이 피듯이, 썩고 병들고 냄새나고, 부패한 그 땅에 감람나무에서는 새 잎이 다시 피어났습니다.
까마귀는 이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 썩은 고기(육체) 손으로 먹이를 얻으려고 왕래하다가 방주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비둘기는 그 썩고 냄새나는 육의 것은 자기의 식물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입은 깨끗하고 싱싱한 새 잎사귀를 물고 온 것이다.
노아는 또다시 7일을 기다린 다음 비둘기를 밖으로 내보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는 그 방주 안에서 나와도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좋은 소식을 물고만 오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이제는 주님께로부터 권능을 받고 썩고 냄새나고, 부패한 곳으로 나가서 말세에 영원한 복음을, 주님 다시 오신다.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사도를 부르신 것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하심이라(막 3:14)고 하였다.
주님과 항상 함께만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마 10:5절에 열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명한다는 말은 군사 용어이기도 하다. 1)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칙령을, 2) 군대의 명령, 3) 스승의 훈계, 4)친구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 등에 사용되어진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가도 좋고, 안 가도 좋은 명령이 아니다. 사도들을 내어보내시며,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화난 전에는 방주로 들어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환난이 지난 후에는 방주에서 나오라고 명하셨습니다(창 7:1, 8:16),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 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었음이라고(창 9:1~3) 말씀하셨다. 여기서 ‘모든’이란 단어가 4번이나 기록되어 있다. 하늘과 바다와 땅의 모든 것들은 방주 안으로 들어갔던 자들의 것이다. 방주 밖의 모든 것들은 다 멸절되었기 때문에 홍수 심판은 의인 노아를 구원하기 위한 것임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심판의 어두운 면만 보지 말고, 사랑의 밝은 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비둘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온 세계만방에 날아다니면서, 이 집, 저 집 드나들면서, 이 마을 저 마을, 또는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날아다니면서 구원의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나는 방주 안에서 살아 나왔다, 나를 살게 한 이는 노아였다. 나는 40주 40야 홍수 심판 때에 방주 안에 있었노라고 말입니다. 거기서 홍수를 피하고 피난을 했었다고 말입니다. 거기에 참 안전과 평안이 있었다라고 날아다니면서 이 소식을 전했을 것입니다. 은혜로 살아남은 자는 그 은혜를 만방에 알릴 의무를 가져야 한다. 까마귀와 비둘기가 방주 안에 있을 때는 그들은 함께 노아에게 속해 있었다.
그러나 방주 안에서 나온 후 두 종류로 분리된 것이다. 다같이 구원의 은혜를 받았지만, 하나는 배신이요, 다른 하나는 보답할 줄 안 것이다. 십자가 이전의 12 사도는 모두 같은 사도였다. 그러나 십자가를 앞에 두고 배신자 가룟유다가 나타난 것이다.
말세에는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날 때이다. 한여름 자랄 때에는 모르지만 가을 추수기가 되면 알곡과 가리지는 분명하게 분류된다. 우리는 비둘기같이 성령을 받아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의 사람으로 바꿔져야 합니다. 그리고 비둘기처럼 나가서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에서 영원한 복음을 전해야만 합니다. 오늘은 한국 내일은 세계 곳곳에 날아다니면서 하나님의 이 말씀을 외쳐야 합니다.
방주는 교회의 모형입니다. 방주 안에 들어가는 것은 “모이는 교회”를 뜻합니다. 방주 안에서 나오는 것은 “흩어지는 교회”를 뜻합니다. 나와 여러분은 열심히 모여서 기도하며 말씀을 통하여 은혜 충만 받고, 이곳저곳에 흩어져서 열심을 다해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이 일은 구원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간절히 희망사항은 주님의 품을 멀리 떠나버린 까마귀와 같은 육의 신자가 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오직 우리는 비둘기와 같은 순결한 성도가 되십시다. 그렇게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마라나타!
기도드리시겠습니다.
기사게재일: [2005-02-08 오전 8: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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