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아내, 그리스도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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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아내, 그리스도와 교회

   

2008.07.23 00:46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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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5:22-28
황명환 목사(수서교회)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엡 5:22-28)

나르시소스라고 이름하는 아름다운 소년이 살았습니다. 그가 얼마나 잘 생겼는지 보는 사람마다 그 얼굴에 매료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물가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면서 그 모습에 반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물에 비친 자기 얼굴에 입을 맞추려고 얼굴을 가까이 대었습니다. 그리고 팔을 뻗어 안으려고 그 팔을 물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러자 물에 파문이 일었고, 얼굴이 흔들렸습니다. 그는 자기 얼굴이 도망가는 줄로 알고 착각해서 가면 안돼! 가지 마! 하고 달려 붙잡으려다가 그만 물에 빠져 죽고 맙니다. 그 자리에서 꽃이 한 송이 피어났는데 그 꽃의 이름이 수선화라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소년의 행동과 마음가짐, 즉 자아도취적 증세를 가리켜서 전문 용어로 나르시시즘(Narcissism), 그렇게 이름을 붙입니다.

스코트 텍이라고 하는 정신의학자는 결혼문제에 있어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것, 즉 결혼관계의 결정적인 문제는 이 나르시시즘의 문제라고 지적을 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고, 협력하고, 마음을 모아서 살아가는 것이 결혼관계인데, 한 사람이 자기 생각만 하면서 거기 푹 빠져들기 시작하면 다른 한쪽은 상처받고, 그러다 보면 관계에 금이 가고 깨어질 수밖에 없다는 그러한 말입니다.

이 나르시시즘의 문제가 큰 사건 속에서 발생하는가 하면은 절대로 그렇지를 않습니다. 부부 사이에 큰 문제가 발생하면 대부분의 부부들은 마음이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이 어려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마음을 합치지요. 집에 불이 났다거나 자식이 병들게 되면 부부는 더욱 견고하게 결합되어 그 어려운 일을 헤쳐 나가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부부관계에 있어서는 외부적인 큰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주 사소한 일, 그것이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텔레비전을 보려 하는데 한쪽은 뉴스를 보려고 하고, 한쪽은 연속극을 보려 한다 말이지요. 자, 우리 뉴스 봅시다. 연속극 봐요. 궁금한데. 거, 왜 당신은 맨날 그 찔찔 짜는 연속극만 보고 그래? 수준 낮게시리. 그런다 말이예요. 뭐요? 당신은 수준 높아서 뉴스만 보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다음 말은 여러분이 상상하세요. 별 문제가 아닌 거예요, 아주 사소한 문제인 것이예요.
양말을 벗어 가지고 휙 하고 집어 던집니다. 그러면 그러지 말고 제발 정해진 자리에 좀 조용히 벗어 두세요. 그렇게 말을 하겠죠. 그럼 뭐, 별 것도 아닌 거 가지고 맨날 그래? 당신이 집어다 놓으면 될 거 아냐? 이런단 말이예요. 그야말로 사소한 문제를 놓고 궁시렁 거리면서 맨날 상처를 주고받고, 그것이 보통 부부들의 삶의 현장입니다.
자, 남편이 퇴근하고 돌아왔습니다. 대단히 피곤했어요. 그래서 아, 피곤해! 나 좀 내버려 둬! 하고 자기 맘대로 행동을 합니다. 그럼 남편이 피곤하다고 하는 이 말이 거짓말이냐 하면 아니예요. 정말로 열심히 일했고 피곤한 것이예요. 하지만 문제는 자기만 피곤하다고 생각하는 데 있는 것이예요. 집에서 가정 살림하고, 애 키우고, 여러 가지 일을 뒤치닥거리는 일도 만만찮은 일이란 말이지요. 게다가 여자의 몸은 남자보다는 힘이 부족해요. 그래서 피곤의 강도는 똑같은 거란 말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모르는 것이예요. 이제 남편이 그렇게 말하면 아내는 말하지요. 겉으로 말하든지, 속으로 말하든지 아무튼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도 피곤해요. 그럼 뭐라고 말합니까? 당연히 나오게 되어 있죠. 뭐가 피곤해? 하루 종일 집에 있었는데... 이거예요.
이것이 자아도취요, 이것이 나르시시즘이예요. 자기만 생각을 한다 그런 얘기지요. 그러니까 듣는 쪽은 서운해지는 것이예요. 아니, 그럼 내가 내 집에서 피곤하다는 말도 못하고 살란 말이냐? 그런 말은 아닙니다. 얼마든지 자유롭게, 자기 집에서 피곤하면 쉬면 되는 거고, 표현하고 싶으면 말하면 되는 것이예요. 다만 피곤하다고 말한 다음에 당신도 피곤하지? 그래야 하는 거지요. 이것이 정확한 말이고. 이렇게 말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겉은 멀쩡해도 이 나르시시즘에 빠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어요. 보이는 자기 생각만 하기 때문에 불평도 많고, 원망도 많습니다. 기대만 하기 때문이지요. 자기도 힘들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은 수 없는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이 결혼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원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자아도취적 증세, 이것은 나이가 먹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충분하게 나이를 먹었는데도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어요. 이 나르시시즘을 극복해야만 돼요. 그리고 서로 정말로 마주 바라보아야만 관계는 성숙해지겠고, 행복도 찾아오겠다 그런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나르시시즘을 극복하는 방법이 뭐냐?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회개와 용서`입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원점으로 돌아가자 그런 얘기지요. 첫사랑으로 돌아가자, 그런 얘기입니다. 처음에는 안그랬거든요. 만나고 싶어하고, 그리워했고, 그리고 그 사람에게 뭔가 더 아름답고 좋은 일을 해 주기를 내가 먼저 원했어요. 그런데 어느새 중심이 이동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중심이었는데, 이제는 중심이 나에게로 바뀌었어요. 그래서 지독히도 자아중심적이 되었어요. 정의하자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중심의 이동입니다. 그분 중심으로 움직이면 그 분을 사랑하는 것이요, 나 중심으로 움직이면 나를 사랑하는 것, 자애(自愛)입니다. 그런데 어느 새인가 세월이 흘러가면서 중심이 이동하고 사랑이 식었다는 말이지요. 이것을 고쳐야 되는 거예요. 그러려면 내 속에 있는 이 엄청난 이기심, 자아 중심성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 마음 속에 언제나 나만 생각하는 마음,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헤아리지 못하는 차가운 마음, 이 싸늘한 가슴을 용서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 주시고, 그 은혜로 뜨겁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되는 것이예요.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노와 원망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분노와 원망이 어디서부터 오는가 하면 잘못된 이기심과 특권의식에서부터 나옵니다. `나를 위해 달라. 나를 사랑해 달라. 나는 자격이 있다.` 이것이 특권의식이요. 이것이 충족되지 않으니까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마음, 이 마음을 자기 의지로 이길 수 있느냐 하면 못 이겨요. 정말로 하나님 앞에 가지고 와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회개하는 상대방의 마음을 또한 용서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 회개와 용서가 나르시시즘, 자아도취 증세를 극복하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인정`해야 합니다.

뭘 인정하느냐? 너와 나는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예요. 우리 가끔 그런 말하죠. 저 사람은 참 예의가 있어. 그럴 때, 그 예의의 본질이 뭐냐 하면 상호 독자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너는 나하고 다를 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예의의 본질이요. 반면에 나르시시즘은 무례함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왜? 자기만 생각하잖아요. 이렇게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와 다른 것을 도무지 못봐 줍니다. 그 꼴을 못봅니다. 그래서 나와 똑같이, 내 말대로 따르든지 아니면 다 나의 적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 사람 마음 속에는 자기와 자기의 추종자, 그리고 적만 있을 뿐이예요. 그러므로 그 사람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타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관계는 황폐되어 있는 것이예요. 그래서 겉으로는 매일 소리지르고 호령하는 것 같지만, 그의 마음은 외롭기가 한이 없는 것이예요. 왜요? 관계가 깨어졌잖아요. 이런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나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내도 남편도 나와 다를 수 있고, 내 자식도 내 생각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예요. 그래야만 다른 사람이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자기 자신을 또한 객관적으로 바라볼 안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나와 다를 수 있고, 나와 다른 그 사람의 생각, 그 사람의 가치관, 그 사람의 행동도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이루어져야 타인을 비로소 수용할 수가 있습니다. 비로소 그는 관계 속에 들어간 인간이 되는 것이예요. 그러므로 나하고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세요. 이것이 자아도취, 거기서 빠져 나오는 두 번째 방법입니다.

세 번째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르시시즘이란 자기 욕심에 순종하는 것이예요. 그런데 여기서 순종하는 것은 더 높은 원리와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너와 나를 부부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도 서로 사랑하라 하시는 더 높은 원리와 명령, 거기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예요. 이 명령에 순종하고, 사랑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노력하고, 그리고 정성을 쏟아가고, 그 관계를 확장시키기 위해 노력할 때에 나르시시즘은 극복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연적인 사랑 감정이 얼마 동안이나 유지될까에 대한 논문들이 많습니다. 그런 논문에 보면 인간의 자연적인 사랑 감정은 1년 6개월에서 길어야 3년이다, 그런 말을 해요. 이 무슨 말이냐 하면 지금 사랑을 불같이 하고 있어도 이 사랑의 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한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세월이 가면 그 사랑도 싹 식을 수 있다는 말이예요. 그래서 여기서 연애관계의 이상적인 기간이 나오는 것이예요. 한 3년 해야 된다. 그래야 자연적인 정열이 아닌, 인격과 인격의 만남, 의지와 성숙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을 온전히 할 수 있다, 그런 결론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지금 사랑한다고 해서 이 사랑이 영원히 가만히 있어도, 내가 뒤로 나자빠져 있어도 계속 사랑할 수 있다, 이 사랑의 불길이 타오를 수 있다? 천만의 말씀이예요. 학문적으로 증명된 것이예요. 부단히 사랑을 위하여 노력하고, 수고하고, 가꾸어 가는 그런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꿈에 지옥을 갔더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보니까 전부가 다 피골이 상접하고, 몰골이 흉칙하기가 말할 수가 없어요. `아, 그렇겠지. 지옥이니까.`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식사시간이 되었어요. 뭘 먹고사나 봤더니만 왠걸? 진수성찬이 나오더랍니다. 그래서 묻기를 매끼마다 이렇게 좋은 거 먹냐고 그랬더니 그런대요. 그래서 식사를 시작하는데 이상한 것은 긴 숟가락과 긴 젓가락을 주고, 이것으로 먹으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 긴 젓가락과 숟가락을 가지고 음식을 퍼서 자기 입에 넣습니다. 그런데 이게 들어가나? 너무 기니까 안들어가고, 전부가 다 입 밖으로 흘러나가는 것이예요. 그럴수록 하나라도 더 먹겠다고, 정해진 시간 안에 먹으려고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쩌다 한두개 들어가면 그거 먹고. 그러니까 그 맛있는 음식을 보면서 먹지 못하는 고통, 그리고 더 먹으려고 발광하는 그 모습 자체가 지옥이더랍니다.
이제 그 사람이 천국에 갔는데 천국에 있는 사람 보니까 다 윤기가 좔좔좔좔 흐르는 거예요. 이제 식사시간이 됐는데 뭐가 나오는가 했더니 메뉴는 전과 동(同). 똑같이 긴 젓가락과 숟가락을 주더랍니다. 그래서 저 어떻게 먹고 저렇게 건강할까 했더니만 상대방에게 먹여주더랍니다. 뭘 드시고 싶으세요? 이걸 집어드릴까요? 더 잡수세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실컫 먹고,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그 모습, 그 자체가 천국이더라구요. 똑같은 조건, 똑같은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나 중심을 어디에다 두었느냐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이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이 행복이라고 하는 녀석은 참 이상해서 `나부터 행복하겠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라. 그래서 내가 행복해지면 너에게 행복을 쬐끔 나눠줄게.` 그런 마음 속에는 행복이 없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놓았어요. 그럼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당신부터 행복하세요.` 그렇게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들 때, 진정한 행복이 나에게 오게 되어 있어요. 이게 행복의 원리입니다. 이 원리에 순종하라는 것이예요.

그렇다면 이제 회개하고, 인정하고, 그리고 순종하면 부부 사이의 모든 문제는 깨끗하게 해결되는가? 예, 대부분은 그렇답니다. 그러나 완전히는 안돼요. 왜냐하면 두 사람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 다른 부분은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하나? 그래서 부부 사이에는 결단의 영역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계속 회개하고, 인정하고, 순종하는데도 안돼. 뭔가가 차이가 있어, 그럴 때는 결단하는 것입니다. 더 사랑하기로, 더 순종하기로, 더 이해하고, 더 섬기기로 결단하는 것이예요. 그래야만 부부관계는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아름다운 부부 관계의 모델이 있느냐? 성경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이 바로 그 중요한 모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가장 이상적인 부부관계의 모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어떤 의미에서이냐? 먼저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신 일을 봅시다. 25절, 봉독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주님은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해 희생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다 주셨어요. 여기에는 결코 자기 중심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다 주되 깨끗하게 주셨어요.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주셨는데, 그걸 억지로 주었느냐 하면 아니예요. 자원하여 주셨고, 기뻐하며 주셨고, 그 희생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주셨어요.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예요.
가끔 그런 얘기를 듣습니다. 거, 처자식 먹여 살리기 힘드네. 그래요. 사실은 뭐 처자식 때문에 일합니까? 자기도 먹고 살려고 하는 거지. 처자식이 없어 보세요. 무슨 재미로 살고, 무슨 보람으로 살겠어요? 아내와 자식을 위한 수고, 힘들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주님을 교회를 위해 희생하신 것을 본받는 소중한 명예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수고하고 희생한다 한들 주님처럼 하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는 거예요.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수고를 기뻐해야 되고, 억울해하지 말아야 돼요. 감사해야 되고.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되고, 내 수고의 결과로 가족이 평안히 살아가는 것을 행복한 것으로 받아 들여야 해요. 이게 주님의 마음입니다. 남편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배워야 하는 첫째 것은 이 사랑과 희생이요, 둘째 것은 27절입니다. 봉독합시다.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시면서 이 교회가 영광스러워지기를 원하시고, 그리고 거룩하기를 원하시고, 흠이 없이 예쁘게 만들기를 기뻐하시고, 기대하시고, 즐거워하신다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인정하고, 사랑하고, 배려해주는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기대와 인정.
그러면 이러한 주님에 대한 교회의 자세가 무엇이냐? 22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봉독하십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교회는 자고로 그리스도 예수, 자기의 머리에게 100% 순종하는 것이 교회의 기본 자세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원리입니다. 이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 속에 부부관계의 핵심이 다 들어 있습니다.

대게 남자분들이 아내에게 대하여 결정적으로 실수하는 가장 보편적인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인정`의 문제입니다. 사실 정상적인 남자라면 다 가정을 위해 희생하고 가족을 사랑해요. 그러나 결정적으로 못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아내를 인정하지 않아요. 독립적인 인격으로 아내를 배려하는 데 약해요. 그리고 부인의 일에 대해 가치를 인정하는 일에 남자들은 대단히 인색합니다. 여자를 자기의 부속물로 생각하고, 내 기분에 따라 움직여야 되는 종속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예요. 여자가 나이 40이 넘다 보면 사회생활을 아무래도 남자보다 적게 하고, 한다 해도 제한적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발전의 템포가 느려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자기 갈등이 생겨납니다. 사회는 이렇게 변하는데 나는 정말로 뒤쳐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나의 존재는 정말로 무엇인가? 나 자신의 가치에 대하여 회의하게 되어 있어요. 갈등한다는 말입니다. 이 갈등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남편의 인정입니다. 당신은 가치 있는 사람이요. 내가 이렇게 이룬 것은 내 혼자 힘으로 된 게 아니야. 당신과 더불어 함께 이룬 것이요. 당신은 잘하고 있는 것이고, 귀한 일을 하고 있다 고 할 때에 이 여인들의 근본적인 갈등은 해결이 되는 것이예요. 그런데 본인은 자기 가치에 대하여 의심하고, 회의하고 있는데 남편마저 인정해 주지를 않아요, 독립된 인격으로. 여기에 큰 상처를 여인들이 다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자분들이 보편적으로 범하는 실수입니다.
주님은 27절에 보면 그러지 않으셨잖아요? 영광스럽게 만들고 교회를, 주름잡힌 것이나 티가 없이 만들려고 하고, 흠이 없게 하면서 아름답게 배려하고 인정했는데, 남편들은 안 한다는 말이예요.

반면에 아내들이 남편을 향하여 가장 결정적으로 실수하는 보편적인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순종`의 문제요. 남편이 뭐라고 할 때 꼭 토를 단다 말이예요. 예 알았습니다. 하고 따라가면 되겠는데 아무튼 말이 많아요. 남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시기를 여자가 순종하면 순종하는 여자에게 간이건 쓸개건 다 내어 주게 만들어 놓은 것이 남자입니다. 절대로 남자의 권위를 짓밟지 마세요. 자존심을 짓밟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어요.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순종이요. 아내의 자세가 바로 여기에 있어야 함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어느 남자 분이 저한테 그러시더라구요. 요즘 직장 생활이 얼마나 힘들어요, 그죠?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데, 걱정도 되고 그래서 그 분이 아내에게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여보, 나 퇴직하면 어떻게 하지? 그럼 대부분의 여인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안돼, 안돼, 안돼! 우리 뭐 먹고살아? 열심히 일해서 돈 더 벌어 와. 그러는데, 자기 아내는 그러지 않더라는 거이죠. 괜찮아, 여보. 그만 두라면 그만 두지. 어떡하면 못 살겠수? 집 한채 있는 거 팔아서 시골로 가고, 구멍가게라도 같이 하며 살지. 걱정하지마. 내가 어딜 가든지 당신 따라갈게. 염려하지마. 그러더래요. 그 말이 그렇게 위로가 되었다고 해요. 언제나 당신을 따라 가겠습니다, 그것이요. 교회가 그리스도 앞에 고백합니다. 언제나, 어디든지 가오리다 입니다. 주의 뜻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당신은 옳아요. 당신이 맞습니다. 그리고 어떤 처지에 있든지, 어느 길로 가든지 나는 끝까지 당신 옆에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말아. 이 말이 남자를 살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인들에게 원하시는 대답이 항상 이것입니다.

자, 이제 결론을 맺읍시다.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 이 두 관계 속에서 누가 먼저 해야 될거냐 하는 것이예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누가 먼저 해야 되겠어요? 누구에게 손을 올려주기를 기대합니까? 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먼저 달아야 될까? 원리적으로 생각합시다. 교회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를.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의 열매입니다.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시고, 끝까지 인정하시고, 기대하시고, 사랑하시기에 교회는 감격하고, 충성하고, 주의 뜻을 따르고, 주를 위해 일하고, 열매를 맺어 가는 것이예요. 원리상으로는 남자가 먼저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보세요. 누가 먼저 하라고 그랬나요? 이상하게도 22절에 아내들아 하고 아내들부터 먼저 명령하고, 25절에 남편들아 그렇게 말을 했어요. 그럼 성경은 틀린 것인가? 아니예요. 성경이 틀릴 리가 있나요? 그 당시의 대부분의 교인은 여자분입니다. 그러니까 현실에 맞게 기록한 것이지요. 그리고 가정에서도 예수 같이 믿을 때 처음에 누가 먼저 믿냐면 대개는 여자분들이 먼저 믿어요. 수도 많고. 그래서 현실에 맞게 아내들에게 부탁한 것이예요.

우리 부부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 가장 이상적인 남성상이 어디 있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가장 이상적인 남편상은 어디에 있어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신부된 교회를 향하여 사랑하고, 희생하고, 인정하고, 배려하고, 부드러운 눈빛과 음성으로 말하고, 어루만지시고, 기뻐하세요. 이것이 좋은 남편이 취해야 할 아내를 향한 자세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에게 교회는 끝까지 충성하는 것이예요. 이것이 우리 아내들의 자세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갈 때 우리들의 관계는 아름다워지고, 남편이 이렇게 나올 때 아내들은 기뻐하며, 순종하고, 그를 위해 일하고, 열매를 맺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수서의 모든 가정들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그것을 우리 부부관계의 모델로 삼아서 남편은 아내를 먼저 사랑하고, 희생하고, 인정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따라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교회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 그 인정과 배려와 다정함을 남편들이 본받게 하옵소서.
자기 중심적 나르시시즘에서 건져 주시고, 서로 마주 바라보게 해 주시며, 또한 아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교회의 충성과 순종과 열매맺음을 본받아 기쁨으로 남편을 따르며, 그 안에서 즐거워하게 하옵소서.
경직되고 건조한 부부관계, 때로는 두려운 부부관계에서 벗어나 이제는 다정함과 친밀함이 있는 부부 되도록 주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안 믿는 가정에는 아내가 먼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순종하게 하옵시고, 믿는 가정은 그리스도를 닮아 남편들이 먼저 사랑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얼마나 본래의 모습에서부터 멀리 나와 있는지 말씀으로 비춰 주소서.
오늘의 현실을 예수의 빛 가운데서 발견하게 하시고, 주님께 나가 치료받고 더욱 새로워지는 행복한 부부들,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사게재일: [2003-07-27 오후 4: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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