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해 서머나교회와 그 사자에게 보내신 계시입니다. 서머나교회는 여기 기록된 대로 많은 핍박과 환난과 궁핍을 겪고 있던 교회입니다. 또한 서머나에는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실상은 사탄의 회에 속해 있던 자들이 있어서 교회를 훼방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환난이 잠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십일간 계속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서머나는 주전 300년경에 알렉산더 대왕이 아주 세밀하게 계획해서 세운 도시였습니다. 서머나는 소아시아의 중심지로 인도와 파사에서 로마에 이르는 무역로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여러 가지 모양의 주화들을 보면 이 도시는 매우 풍요했던 것 같습니다.
서머나교회의 역사에 대해서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내용 이상의, 자세한 기록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가 말할 수 없이 심한 환난 속에서도 충성스럽게 신앙을 지켰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의 내용으로 보아 서머나교회는 주님께 칭찬들을 만한 교회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마귀는 교회를 말살시킬 목적으로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교회의 사명을 다하게 될 때 세상의 집권자들에게는 곧 위협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은 빛을 싫어합니다. 빛을 미워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빛의 사명을 다해서 어두운 면을 밝히면 세상은 교회를 핍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와 같이 주님의 교회를 말살시키려는 계획이 무참하게 실패해 버린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배후에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지나간 일들을 생각해 봅시다. 언제나 악한 세력이 일어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갖은 핍박을 가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핍박이 가해지면 가해질수록 교회의 모습은 더욱 순수해지고, 새로워지고, 내적으로 더욱 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서머나교회의 경우도 악한 세력의 핍박이 심해질수록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에베소 교회의 책망을 거울삼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래서 서머나교회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한마디 책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마귀는 한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몸인 교회는 아무리 핍박을 가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시대는 핍박이 없는 평온한 상태에서 끝이 났습니다.
그래서 마귀가 교회를 약화시키는 데 가장 효과가 크다고 생각되는 무기를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방임이라는 무기입니다. 안일이라는 함정입니다. 주님의 교회에 아무 어려움이 없으면 오히려 맥이 점점 빠지게 됩니다. `편안해 좋다. 평안해 좋다`하며 졸고 잠들게 됩니다. 세상에 대해 눈이 뜨게 되고,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세상에 물들게 됩니다. 배는 물위에 떠 있어야 하는데 배 안에 물이 새어들어 오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잘 모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물이 배 안에 점점 더 많이 들어와 결국 그 배가 가라앉고 맙니다. 물 속에 가라앉은 배는 배이기는 하지만 배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서머나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8절 하반절에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 라고 했습니다. 다른 곳에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했습니다. 같은 의미입니다. 헬라말 알파벳의 첫 글자가 `알파`요, 마지막 글자가 `오메가`입니다. 즉 이 말은 `처음과 나중`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처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 처음에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은 창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하실 일은 무엇입니까? 심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처음이요 나중 이라고 하신 말씀은 주님이 창조주요 심판주시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사실 핍박을 받고 있는 서머나교회에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영원 전부터 계시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 때 어떠한 핍박과 환난도 능히 참고 이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심판을 믿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주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 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완전히 죄로 죽을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사심은 구속의 완성을 확보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복음을 위해 박해를 받아 순교한다고 해도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어떠한 핍박이라도 참고 이길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순교까지도 감수할 수 있는 용기와 담력 그리고 위로를 주십니다.
주님이 죽으시고 그것으로 끝나셨다면 어떻게 계속 힘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오늘도 살아 계셔서 우리에게 능력을 공급하여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제 이 살아 계신 주님 앞에 가서 다시 서게 될 것을 생각할 때 더욱 힘이 솟아남을 느낍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도 살아 계셔서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더구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내리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신 말씀 9절을 보세요.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안다 고 했습니다. 환난은 신앙을 위해서 당하는 어려움을 말합니다. 서머나교회는 신앙 때문에 큰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머나교회는 그 어려운 핍박을 참고 견디어 냈습니다. 복음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은 교회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오늘까지 줄곧 박해를 받아 왔습니다. 이와 같은 박해를 이겨나가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위대한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다 이 어려움을 극복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서머나교회를 칭찬하셨습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이것을 다 아신다 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핍박을 참고 견딘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마지막날 심판 때 다 갚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용감히 싸워 이겨나가야만 합니다.
주님은 그들의 환난 당하는 것만 아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궁핍도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 고 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궁핍한 자리에 있으면서 비굴해지지 아니하고, 원망하거나 시비하지 아니하고, 신앙을 지킨 것을 주님이 아셨습니다. 세상 사람이 다 몰라줘도 주님이 알아주신다면 그보다 만족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서머나교회에 핍박이 가해지면서 믿는 사람들이 물건을 팔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자리를 잃어서 돈 벌 기회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서머나교회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가 직면했던 문제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킨 서머나교회는 실상은 부요한 자 였습니다. 육신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영적으로는 부한 것이 정말 큰 축복입니다.
오늘의 교회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서머나교회와는 정반대의 현상입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리면서 영적으로는 빈곤한 상태에 있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사는 것이 그 가산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돈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이 전부는 아닙니다. 돈 이외에 중요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참된 부는 결코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말대로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될 때 내가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그만큼 부요한 자가 됩니다.
서머나교회는 외부로부터 핍박을 받고 환난을 당하고 내부에서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저희 스스로 유대인이라고 하면서 실상은 거짓 선생들인 자들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서머나교회 교인들 가운데는 사단의 회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것 이외의 것을 전했기 때문에 주님께로부터 책망을 들은 것입니다. 그들은 성도가 아니라 사단의 회원이었습니다.
이 사단의 회는 예나 지금이나 계속해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역사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도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10`이라는 숫자는 인간의 수(數)로는 만수(滿數)인데 아무리 길고 혹독한 박해라도 일정한 기한이 있고, 그 다음에는 축복이 있을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두 가지 격려의 말씀을 하십니다.
우선 두려워 말라 고 하십니다.
이사야서에 보아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3장에도 내가 과연 너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했습니다.
두려해야 할 때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만용이요,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때 두려워하는 것은 비겁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밖에 두려워할 분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우리가 두려워합니까? 한마디로 믿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풍랑 만난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자기들의 기술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왜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이다지도 믿음이 없느냐? 하셨습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확고한 신앙입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생과 사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태연하게, 안심하고 있을 수 있는 거기에 참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어린애가 밖이 어둡다고 무서워합니까? 아닙니다. 어머니를 의탁하기 때문에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열왕기하 6장 16절에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에 봉착한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말라 는 주님의 말씀 믿으시고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죽도록 충성하라 고 하셨습니다.
`충(忠)`이란 한자를 보면 `가운데[中] 마음[心]`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옆에 있는 마음이 아니라 중심으로 무엇을 하는 것을 충성이라고 합니다. 중심은 곧 진실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충성이란 말의 근본 뜻은 `믿음`과 `미쁘다`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faithful`이란 말을 씁니다. `faith`는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직스럽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그러므로 믿을 만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믿음직스러워야 합니다. 너희를 부르신 이는 미쁘시니 그가 이루시리라 하셨습니다. 미쁜 것과 충성은 하나님의 근본 성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충성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의 성품 가운데 기본적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성령의 열매를 말하면서 이 충성도 한 요소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사람은 재주와 능력이 각각 다릅니다. 그렇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이 충성의 성품이 다 있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성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맡은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청지기입니다. 관리인입니다. 맡은 사람은 신실해야 합니다. 주인이 볼 때 믿음직스러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맡았느냐, 혹은 얼마를 맡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맡은 것을 얼마나 충성스럽게 감당했느냐 하는 데 관심이 있으십니다. 재주와 능력이 어떻든지 받은 재주 그대로, 배운 지식 그대로, 가지고 있는 재물 그대로, 얻은 능력 그대로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충성된 사람을 들어 쓰셨습니다. 가령 요셉은 충성된 사람이라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도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갈렙도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도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충성은 우리 믿는 사람의 성품 가운데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이 간사하다는 말을 들으면 부끄러운 일이요,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충성해야 합니다.
충성에는 몇 가지 시금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양(量)의 시금석입니다.
주님께서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 것에도 충성한다 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자기 아버지를 도와서 양을 칠 때 충성된 목자로 일했습니다. 그래서 그후에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었을 때 그 백성을 충성스럽게 다스렸습니다. 요셉은 보디발 장군 집에서 종살이할 때 충성되게 일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애굽의 총리 대신으로 일할 때에도 충성된 대신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어떤 주인이 종들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를 맡기고 멀리 떠났습니다. 얼마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에게 맡긴 것을 계산하자고 했습니다. 다섯 달란트 맡았던 사람은 열심히 장사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겨 내놓았습니다.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도 최선을 다해 장사해서 두 달란트를 남겨 주인에게 내놨습니다. 주인이 그것을 받을 때 다섯 달란트 남긴 사람에게나 두 달란트 남긴 사람에게나 똑같이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라 고 칭찬했습니다. 만일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충성되게 일해서 한 달란트를 남겨 왔다면 그 역시 똑같은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충성된 사람이 되려면 먼저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와 저녁에 잘 때 기도하는 것은 사실 작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을 꼭 지키는 것이 충성입니다. 예배시간에 안내를 맡는 일이나, 헌금위원으로 일하는 것, 계수하는 것, 성가대원으로,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는 것, 구역을 책임지는 것이 그렇게 큰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일 맡아서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사람이 큰 일을 맡아도 충성합니다.
둘째는 시간의 시금석입니다.
얼마나 오래 충성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속담에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엇이나 맡아서 충성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열심이 얼마나 오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전에 가룟 유다 같은 사람도 처음에 예수를 따를 때 한 2년쯤은 열심으로 충성스럽게 일을 했기 때문에 회계의 책임을 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3년째 되는 해에 예수를 배반했습니다. 데마 같은 사람도 처음에는 열심히 사도 바울을 도우며 따라 다녔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는 그 사도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충성에는 이와 같이 시간의 시금석이 있습니다.
Scotland 의 Edinburgh 어느 교회 묘지에는 개의 무덤이 있고 그 무덤 앞에는 충견비가 서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개를 길렀는데 그 주인이 죽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그 죽은 사람의 장례를 지내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키우던 개만은 절대로 돌아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끌고 오려해도 이 개는 주인의 무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루 이틀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니까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이 주인의 무덤을 지키고 있는 개에게 먹을 것을 날라다 주었습니다. 이 개는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14년 동안 주인의 무덤을 지켰다고 합니다. 이런 개는 우리 사람보다 낫습니다.
충성은 지내보아야 압니다. 교회를 봉사하는 것도 몇 해 동안은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0년, 20년 꾸준히 봉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간의 요소가 있습니다. 전쟁에는 최후의 5분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잘해 오다가 마지막에 가서 실패하면 안됩니다. 여기에 참된 충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맡은 일이 무엇이든지 끝까지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1999년, 다시 말해 1900년대의 마지막 부분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제 26일 있으면 1900년대가 지나가고 새 천년, 2000년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끝까지 충성함으로 1900년대를 잘 마무리지어야겠습니다. 유종의 미를 맺읍시다.
그리고 셋째는 환경의 시금석입니다.
녹음방초(綠陰芳草) 승화시에는 송죽의 절개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찬바람이 불고 흰눈이 펄펄 내리게 되면 송죽의 참 절개를 알게 됩니다. 옛글에도 나라가 어지러워질 때 양상(良相)을 안다고 했습니다. 집안이 가난할 때 어진 아내를 알 수가 있습니다. 충성이 언제 나타납니까? 어지러운 일이 일어나고 환난이 있고 핍박을 받을 때 나타납니다. 이와 같이 어떤 환경을 당하든지 꾸준히 자기의 책임을 지켜나가는 것이 충성입니다.
영국의 London의 Walker 미술관에는 미술가 Contler라는 사람이 그린 `충성`이라는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은 Pompei라는 로마의 도시가 베스비어스 화산이 폭발되면서 화산재에 도시 전부가 묻혀버려 멸망당하는 광경을 상상해서 그린 것입니다. 화산의 재와 불이 눈같이 Pompei성에 내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겠다고 성문으로 조수처럼 밀려 나아갑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문을 지키는 책임을 맡은 군인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본래 로마 사람입니다. 그는 성문을 지키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공중에서 쏟아지는 화산재를 피해 성문을 빠져나가느라 아우성인데 이 군인만은 아무리 눈처럼 재가 쏟아지고 불이 내려도 자기의 창을 굳게 잡고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서서 죽음을 기다립니다. 이것이 충성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서머나교회의 감독이 폴리갑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오랫동안 교회를 섬기면서 살았는데 그가 86세가 된 때에 로마 정부에서 온 제국에 기독교를 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86세의 폴리갑을 로마의 관리들이 끌어다 놓고 이제라도 네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살려 주겠지만 그냥 그리스도를 믿겠다면 죽일 수밖에 없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때 노(老)폴리갑 감독은 조용히 86년이란 긴 세월을 내가 우리 주님을 섬겼는데 주님께서는 한번도 나에게 잘못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내 왕을 훼방할 수 있습니까? 라는 말을 남기고 순교했다고 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작은 일에 충성하라 끝까지 충성하라 어떤 환경에서도 충성하라.
우리 민족성은 충성입니다. 삼국시대에서 우리는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 백제의 계백 장군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조선시대에서 단종 시절의 성삼문을 위시한 사육신의 충성을 보게 됩니다. 임진왜란을 통해서는 이순신 장군의 충의, 한말에 와서 민 충정, 이 준, 안중근 같은 충성의 역사가 우리나라의 역사를 단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한국교회의 역사를 보아도 수많은 교회지도자들이 자기의 생명을 기쁘게 바쳐 한국 교회를 빛냈습니다.
새 천년을 바라보면서 주님께서 우리 교회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는 말씀을 기억하며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끝까지 충성된 일꾼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의 면류관을 다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