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고난

12월 22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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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고난

   

2008.07.23 00:42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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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규 목사(순복음인천교회)
성경:마태복음 27:46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고난 , 세 번째 시간입니다.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이 뜨거워지고, 또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납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체험을 합니까? 그런 체험합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죽은 신앙이 아니라, 산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고난.

그렇습니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을 때, 원수된 우리를 위해서, 죄를 지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을 떠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로마서 5장 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증거가 뭐냐? 죄 없으신 예수님이, 허물도 없으신 예수님이, 그렇게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정하셨다, 그 말입니다. 사람들이 욕하고 비웃는 것을 다 들으면서도 대신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0절로 11절입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고 비웃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0절입니다.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그랬습니다. 사단은 첫 아담을 유혹했듯이 마지막 아담을 유혹합니다. 죄와 어둠에 묶인 영혼들을 동원해서 예수님을 실패자로 만들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영적으로 묶인 것도 모르고 사단의 말을 대변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는 이러한 모든 궤계를 다 파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사망의 세력을 꺾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고 마귀를, 사단을 꺾는 승리인 것입니다. 몸소 당하신 고난으로 죄와 죽음에 신음하는 영혼을 자유케 만드셨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의 영적 고난을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를 누리게 된 영적 자유와 풍요로움을 깨닫고, 더 감격하면서, 더 기뻐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수님께 가까이 가며, 예수님의 본을 받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첫째,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고난

첫째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고난.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중에, 예수님의 영적 고난 중에 정말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뭐냐?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고난 입니다. 창조주이신 예수님, 세상 만물을 하나님과 함께 지으신 예수님, 그 창조주이신 예수님이 피조물인 사람이 되셨습니다. 또 그 사람 중에서도 죄를 지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께서 가장 연약한 아기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또 천한 자리에 오셨습니다. 지혜와 선함과 아름다움의 주인께서 가장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6백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예언해놓으셨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한없이 낮추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추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것뿐만 아니라, 죄인으로 오신 것뿐만 아니라,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추셨습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빌립보서 2장 6절로 8절 말씀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사람의 모습으로 온 것도 낮추신 건데, 죄인의 몸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자기를 낮추시고 또 낮추셨다 ,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왜 그처럼 낮추셨을까요?
예수님이 사람 으로 낮아지신 것은 사람 을 구원코자 함입니다. 짐승 을 구원코자 함이 아니라, 사람 을 구원코자. 왜 그렇습니까?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은 것은 짐승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지은 것입니다. 아담이 지은 것입니다. 하와가 지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를 지은 사람 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사람 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희생이 크면, 역사도 큰 법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므로 모든 사람들의 구원의 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5장 8절로 9절에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죄를 지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누구를 닮아야 합니까?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합니까? 우리도 예수님처럼 낮아집시다. 따라합시다. 나도 예수님처럼 낮아지자 , 나도 예수님처럼 낮아지자.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순절 기간에, 예수님이 고난 당한 고난 기간에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았다면,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이 그렇게 낮아지셨다면,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우리도 이웃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사람을 위해서 낮아지자, 그 말입니다. 낮아지자, 그 말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5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안 믿는 사람보다 더 많이 일해야 해요. 학생은 더 많이 공부해야 됩니다. 더 많이 땀흘려야 됩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는다 (신 28:13)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학생은 더 앞장서 가야 되요. 사업하는 사람들은 더 많이 돈을 벌어야 되요. 정치하는 사람이라면, 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은 권력을 얻어야 해요. 중요한 것은 뭐냐? 실력은 최고로 가지나, 삶은 섬김의 본을 보여야 된다, 그 말입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섬기고, 가지면 가질수록 섬기고,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섬기고, 실력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겸손해지고, 섬기는 자세로 살아가야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런 삶이 우리 예수님을 닮는 삶 인줄 믿습니다.
저는 지난 3월 6일 조찬기도회 때 그런 말을 했습니다. 섬김을 받는 사람이 섬기려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랬습니다. 섬김을 받는 사람이 섬기려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랬습니다. 마가복음 9장 35절입니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첫째가 되고자 하면, 최고가 되려고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지금도 사람들과 함께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함이라} 말씀하십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누구와 함께 계시느냐?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사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 지키고 행하는 사람에게 우리 예수님이 항상 같이 하시겠다 했습니다. 그런 말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도하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하리라. 날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우리가 아픈 것보다 우리 예수님이 더 아파하십니다. 아멘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를 보지말고, 나와 함께 하시는 사랑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믿고, 그분을 붙들고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둘째, 의인이 죄를 짊어지신 고난

둘째, 예수님의 영적 고난이 뭡니까? 의인이 죄를 짊어지신 고난. 죄인이 죄값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죄인이 아니면서 죄값을 받는 것은 너무나 억울한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십니다. 죄를 짓지도 아니하셨습니다. 허물도 없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그 죄를 짊어지실 생각을 하니까, 그것을 바라보니까, 그걸 환상으로 보니까, 정말 큽니다. 한 사람의 죄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죄입니다. 아담이 지은 죄, 하와가 지은 죄, 그 죄를 짊어지시고 당신이 갈 길을 생각하니 예수님이 정말 무섭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38절로 39절 상반절입니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무거웠기에, 예수님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기에 이렇게 외치시냐, 그 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 한 사람의 죄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죄를, 지금 사는 사람의 죄만이 아닙니다. 창조 이래로 지나간 날의 모든 과거의 사람들의 죄, 현대의 사람들의 죄, 현재 지금 이 지구상에 60억 이상이 살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더디 오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살아갈 모든 사람들의 죄, 모든 죄를 다 짊어지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죄를 진 우리가, 죄인 된 우리가, 의인되어서, 하나님의 아들 되어서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죄가 없으시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그렇게 죽게 하시고, 고통 당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따라합시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때문에 죄에서, 사망에서 해방되었다.
구원의 확신이 있다면, 죄와 사망에서 가난과 저주에서, 죽음에서 해방 받았다는 확신이 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항상 기뻐하는 겁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겁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겁니다. 감사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해야 할 첫째가 뭐냐? 기뻐하는 거예요. 어린 아이가 그저 엄마 앞에서, 아빠 앞에서 기뻐하는 것처럼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우리가 이 고난주간에 우리가 느껴야 할 것이 뭐냐? `아, 나는 죄악과 사망에서 해방 받았다. 감사하다.` 하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요한복음 8장 36절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말씀합니다.
사단이 심어주는 죄책에 더 이상 시달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31장 34절 하반절에 보니까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아무 조건 없이 죄에서 용서받았듯이, 우리도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순절 기간에 예수님이 고난 받으셨다. 그 고난 때문에 죄가 사함 받았다. 내가 사망에서 해방되었다. 이것을 우리가 믿고 있다면, 이 고난주간에, 사순절 기간에 어떡할 것입니까? 아직 내가 용서 못한 사람이 있다면, 내가 너무 억울해서 너무나 손해 많이 받아서, 내가 마음이 아파서 용서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용서해주는 것이 사순절 기간에, 고난주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인 줄 믿습니다. 따라합시다. 내가 용서받은 것처럼 나도 용서하자. 내가 용서받았으니 나도 용서한다. 아멘. 이것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말합니다. 마태복음 18장 32절로 33절입니다.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힌 존재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 말씀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십자가에서 죽은 우리에게 원한이나 증오, 미움 따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신 고난

세 번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신 고난. 항상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그랬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죽으실 때에는 우리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픈 일은, 큰 아픔은 뭡니까? 버림받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이 어디 있겠습니까?
고난을 당해본 사람이 압니다. 다윗은 고난을 당해봤습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했습니다. 사람들한테 범죄했습니다. 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 그를 잠시 떠났어요. 그와 함께 하신 성령이 잠시 그를 떠났어요. 그것이 심히 두려워서 하나님께 간절히 외칩니다. 시편 51편 11절입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울면서, 눈물 흘리면서, 부르짖고 기도하는 다윗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일 불쌍한 사람은 누구라고요? 버림받은 사람. 제일 불쌍한 사람은 누굴까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이 처절한 고통을 예수님이 당하셨습니다. 저주받은 십자가 위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6절이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십니다.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맨 마지막에 외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이 매 맞으신 것보다 더 아픈 것, 가시관 쓰신 것보다 더 아픈 것,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매를 맞은 것보다 더 아픈 것,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신 것보다 더 아픈 것, 옆구리에 창을 찔려서 물과 피를 쏟으시는 것보다 더 아픈 것,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거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거다, 그 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늘 함께 하셨습니다. 항상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이제 감히 아버지를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왜요? 죄인의 모습으로 죄인을 대신해 죽으셨기 때문에. 시편 기자는 이때 예수님의 상황을 이렇게 예언합니다. 시편 22편 6절에 보니까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하나님께 외면당한 예수님은, 그 모습은 마치 뭐와 같습니까? 범죄한 인간의 종말을 상징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공포에 떱니다. 고독하다고 말합니다. 절망이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외면당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외면당하면 불안합니다. 공포가 엄습합니다. 고독합니다. 절망이 가득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기에 불안한 것입니다. 만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교제하고 싶어도 우리에게 죄가 있을 때,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합니다. 처음에 예수 믿을 때는 은혜가 됐는데, 왜 지금은 은혜가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처음에 은혜 받을 때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주께 나왔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왔습니다. 듣는 말씀만 해도 모두가 감사, 큰 감격, 기쁨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가면, 신앙의 연조가 생기면 조금씩 교만해지기 시작합니다. 직분이 높아지면 교만해지기 시작합니다. 그 때는 교만하면 하나님이 가까이 해주지 않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가물어도 낮은 계곡으로 내려가고 내려가면, 분명히 물이 있고 수분이 있어서 나무가 잘 자랍니다. 그러나 산 중턱으로 올라가고, 정상으로 올라가고 올라가면 수분이 없습니다. 나무가 말라버려요. 그 나무가 살기 위해서는 나무는 산 중턱에 있지만, 그 뿌리는 그 낮은 계곡까지 박지 아니하면 그 나무는 자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하여, 은혜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이 뭐냐?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는 것, 날마다 성령님을 사모하고 성령세례 받고, 성령충만하고,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듣고, 말씀을 실천하고, 나가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날마다 강물처럼 넘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날마다 은혜가 넘치고, 사랑이 넘치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박국서 1장 13절 상반절입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죄로 막힌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19절로 20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예수님의 육체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 휘장이 예수님의 육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의 막힌 담을 다 허물어서 하나가 되고 화목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모든 죄가 용서 받을 뿐만 아니라, 죄인이 의인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되어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예수님이 매 맞으시고, 가시관 쓰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고, 그 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시고, 하나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그 아픔과 고난을 예수님이 당하신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가 있기에 우리의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있다? 없다? 공짜는 있다? 없다? 없다. 사람들이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공짜.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공짜로 받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 편에서는 독생자를 희생하셨고, 예수님 편에서는 한번밖에 살 수 없는 생명을 십자가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공짜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아무 대가 없이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만드시기 위해서 엄청난 대가를 하나님이 지불하셨고, 예수님이 지불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본받아서, 자기희생을 통해서, 자기희생을 통해서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됩시다. 빛이 비추려면 손은 녹아야 되고, 장작은 타야 합니다. 형체를 잃어버려야 빛이 나옵니다. 초는 형태가 녹아야 빛이 나오고, 장작은 형체가 없어져서 타버려야 재가 되어 빛이 발하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인 것입니다. 내가 질 십자가 내가 지고, 예수님처럼 성령에 의지해서 우리가 갈 때, 가정이 변화되고, 구역이 부흥하고, 교회가 부흥하고, 우리가 사는 이 나라가 잘 살 수가 있습니다.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될 수가 있습니다. 죄가 물러가고 의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살맛 안 난다는 사람이 살맛 나게 됩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날마다 사랑해주시는 주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주님,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생각하면서 감사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이 바뀌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기사게재일: [2003-04-17 오후 12: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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