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의 완성이신 예수님

12월 22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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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일조의 완성이신 예수님

   

2008.07.23 00:43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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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신14:22-29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서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으로 가서

무릇 네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우양이나 포도주나 독주등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네 성읍에 거하는 레위인은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니 또한 저버리지 말찌니라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인간은 자기라는 존재가 먼저이기 때문에 자기 쪽에서 항상 생각하고 결정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우리가 숲 속을 걸어 가다보면 새들이 지저귑니다. 이 때 새소리를 듣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그 새의 소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우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노래하는 듯 들릴 뿐입니다. 마치 얼마 전에 남편을 잃은 사람 같으면 비둘기의 소리는 구슬픈 울음소리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네가 나의 구슬픈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그러나 한창 사랑에 빠져 있는 연인들의 귀에는 `구꾸르 구구`하는 소리는 서로 좋아서 비둘기 연인들끼리 애정을 표현하는 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순전히 자기 쪽에서 자기 생각을 가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쪽에서 정해 놓고 자기 마음을 표현했을 뿐입니다. 지금 자신의 처지가 어떠하냐? 지금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모든 말씀을 대할 때도 나타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십일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평소 내가 물질적인 아쉬움을 해결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십일조를 언제나 자기 관점에서 대하려고만 합니다. `어떻게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는가? 복 받는 비결이 무엇인가?` 그러나 이것 역시 자기를 어떻게 살찌울 것인가 하는 것밖에 들어 있지 않는 사고방식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을 살펴보면서 어디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신에게 관심 가지라고 구원하신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구원하신 분에게 관심을 가지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십일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어떻게 십일조 하면 복 받을 것인가에 관심이 있겠습니까? 아니면 도대체 십일조가 무엇인가? 어찌해서 십일조를 하게 하셨는가? 왜 십일조가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이 되는가? 여기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일조 속에 나타나 있는 본래 정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십일조 내라가 아니라 십일조이신 예수님을 왜 믿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에게 십일조 하라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십일조를 통해 바른 인간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에 십일조의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저도 크면서 십일조를 강조하는 교회에서 항상 교육받은 초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일조를 때먹지 말고 십일조를 잘하면 복 받는다. 십일조를 어떻게 할 것인가? 온전한 십일조는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는 것이다.` 뭐 이런 것에 초점을 맞추어 교육받았습니다. 그러나 십일조의 의의는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십일조에 대해 있듯이 어떻게 내느냐가 목적이 아니라, 모아진 십일조가 어떻게 흥겹게 즐겁게 기분 좋게 쓰이느냐? 그리고 누구에게 쓰여지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26절에 보십시오. 신 14:26 무릇 네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우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십일조를 누구와 함께 먹으면서 즐거워합니까? 바쳐진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서 자신과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하랍니다. 왜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까? 먼저 십일조의 출처가 어디인가부터 봅시다. 십일조의 출처는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토지에서 나왔습니다. 이 토지는 그냥 토지가 아닙니다.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얻어진 토지입니다. 이곳 저곳에는 어린양의 피가 근거가 되어 소산이 나왔습니다. 그러니 십일조의 소산은 어린양의 희생의 결실이었습니다. 이 결실을 가지고 누구와 먹었다고요. 자기와 자기 권속들과 같이 먹고 즐겼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희생의 결실인 십일조를 가지고 자신과 권속들과 같이 먹게 했다는 것은 이 일로 말미암아 같이 길이길이 어린양의 희생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땅에서 난 십일조 먹으면서 `이 사람아 우리가 지금 무엇을 먹고 있는가? 잊지 말게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어린양의 희생의 피로 말미암아 얻은 땅에서 난 것을 먹고 있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지금 즐거워하며 기뻐할 수 있게 되었네. 자네는 이것을 아는가?` 이 말입니다.

그러니 구약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려진 십일조로 자신과 자기 권속들과 같이 앉아 먹으면서 즐겼다는 것은 `나는 하나님의 희생 덕분에 공짜로 이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즐겁고 기쁜 일이 벌어졌다.` 는 말입니다. 마치 우리 교회가 이 지하에 세를 주고 모이고 있습니다. 세를 주고 붙어 있다는 것은 이 지하실이 우리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지하실에 붙어 살 수 있게 된 것이 주인이 투자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마찬가지 구약에 십일조를 내었다는 것은 땅이 자기의 힘으로 얻었다든지 자기 것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따로 있는데 그 주인 덕분에 이렇게 붙어 살게되었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이런 취지에서 했습니다. 십일조 내면서 무조건 먹고 즐기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토지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의 덕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즐겁고 기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잔치가 십일조 내면서 하는 잔치였습니다.


그러면 최초의 십일조를 봅시다. 최초의 십일조는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출발합니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언제 했는가 하면 자기 조카를 구하기 위해 318명의 사람을 데리고 나가 수만 명의 군대를 이겼습니다. 이 때 이기고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오는데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이 나와 떡과 포도주로 환영했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알았습니다. 자기가 나가 싸워 이긴 전쟁이 자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그 전쟁을 이기게 배후에서 역사 했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리품 중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바쳤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장차 아브라함과 똑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 있게 하여 그들 역시 세상을 이기게 하고 마귀를 이기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다시 말하면 십일조 받는 쪽이 십일조 주는 쪽을 반듯이 구원해 주겠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하나님께 하고 그 바쳐진 것을 도로 환원하여 자기와 권속들과 같이 나누어 먹으면서 `내가 지금 즐기고 있는 인생은 내가 뭐 잘나서 내가 얘를 써서 기뻐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십일조 받으신 하나님의 덕택입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과거도 내 것이 아니었고, 현재도 내 것이 아니요, 미래도 내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덕분에 과거도 즐겨왔고 현재도 즐기고 있고 미래도 즐길 것입니다.` 이 말입니다.

지금까지 말씀해 온 것을 정리하면 십일조 속에서 1)내 쪽에서 받아서 환원하여 드리는 것 2)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즐기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오늘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몸이요 예수님의 피인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땅, 곧 어린양의 피 덕분에 얻은 땅에서 얻은 소산을 바치고 그것을 얻어먹고 즐거워했습니다. 이것을 신약에 와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어린양 되는 예수님의 몸을 바쳐서 거기에서 나온 피 덕분에 우리는 죄 용서 받고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니 우리가 먹고 즐기는 십일조는 바로 하나님에게로부터 나온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즐거워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십일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십일조를 드리면서 함께 권속들과 먹고 즐기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을 되돌려서 하나님의 권속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십일조구나. 그러면서 십일조를 하면서 구원에 참여했습니다.그러나 이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예수님의 몸이 드려지고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아 이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말미암아 구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하나님께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영원히 즐거워하며 기뻐할 수 있는 것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받쳐진 십일조 되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돌려 그 몸과 피를 빙 둘러앉아 뜯어먹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신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곧 예수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길을 가며 같은 처지를 당하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한 덩어리, 연합이 되라고 합니다.

우리가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 가지고 즐거워하는데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모여 즐거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편입시험 합격했다든지 대학원 시험에 붙었다든지 결혼해서 신혼여행 잘 다녀와 내가 원하는 가정 꾸미게 되었다고 즐거워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지요. 아니면 내 자식이 앞으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자신이 좋은 직장에 취직하거나 앞날이 훤하게 튀기 위해 모인 것도 아닙니다. 만약 이런 생각으로 교회 왔다면 모두 자기 혼자 생각에서 교회 온 것입니다. 마치 숲 속을 지나가다 자기 슬프니까 비둘기 소리 듣고 `아 저 비둘기도 내 마음을 알고 저렇게 울구나.` 오직 자기 혼자 생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비둘기는 그냥 자기 동료에게나 아니면 자기 나름대로의 소리를 내고 있는 중입니다.

마찬가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십일조를 하게 한 것은 자기 처지를 생각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신 십일조 되시는 예수님 아버지께 드려져 받으셨기에 예수님과 같이 즐거워하고 예수님이 아버지로 인하여 살아가신 것 같이 우리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이 아버지께 드려진 덕분에 우리가 아버지께로 갈수 있게 되었으니 예수를 바라보고 그 분만을 믿는 자, 사랑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 오심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돈이나 짐승이나 물건으로 드려지는 십일조는 끝이 났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십일조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십일조를 모르는 사람들은 아직도 십일조를 해야 복 받는 것처럼 말라기를 인용하고 마태복음에 나와 있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라고 하면서 아주 강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왜 마태복음에서 십일조를 강조하고 있는가 하면 십일조의 정신을 놓쳤다는 것 때문에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을 정확하게 보면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래놓고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 말씀은 인간들이 예수님 당시에 십일조를 어떻게 했는가 하면 양념의 십분의 일, 즉 깨 수확하면 십분의 일 바치고, 소금 수확하면 십분의 일 바치고, 쌀 수확하면, 월급타면 십분의 일 바치고, 보너스 타면 십분의 일 바치고, 은행이자 받으면 십분의 일 바치고, 용돈 받으면 십분의 일 바치고 다 했습니다. 그런데 빠진 것이 있었습니다. 의와 인과 신은 못 드렸습니다. 아무도 못 드렸습니다. 곧 이 말은 인간들이 수입의 십분의 일은 하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십일조가 드려져서 의와 인과 신을 발생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돈이나 물질이 이것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십일조 했다고 좋아했습니다.
분명 인간이 이것들을 만들 수 있었으면 계속 십일조 내고 복받아 라고 했겠지요. `의(judgment)와 인(mercy:은혜, 자비)과 신(faith:믿음)`은 하늘로서 오신 분에 의해서만 만들어지고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3:21에 이제는 율법(십일조도 포함)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요한복음1:16-17절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그리고 히브리서12:2 절 믿음의 주(the author: 창시자) 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정 의와 인과 신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예수님께서 완전히 하나님께 드려진 십일조가 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라는 것은 구약이 끝나는 시점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만들 드려봐 라는 것입니다. 정말 십일조를 알았다면 의와 인과 신을 자기들이 못 만들어 내고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고 진짜 십일조를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몰랐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십분의 일 쪼개 십일조 헌금한다고 십일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직도 구약의 율법에 얽매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예수님을 십일조로 믿고 예수님과 연합한 자로서 즐거워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참 웃기는 것은 다른 율법은 다 완성되었다고 하면서 왜 굳이 십일조만은 하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율법에 여자가 남자가 입는 옷을 입지 말라고 하는 것은 금하지 않습니까? 왜 면과 화학섬유 합성 옷 입지 말라고 하지 않고, 무당 잡아죽이라고는 하지 않습니까? 다해야 하지 않습니까? 왜 그런 것은 완성되었다고 하면서 꼭 돈과 관련된 십일조는 완성되었다고 왜 말 못하는지 속이 보이지 않습니까?

관심이 딴데 있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만약 아직도 구약의 십일조 개념으로 십일조 하면서 안하면 저주 받고, 하면 복받는다는 식으로 한다면 이것은 엄연한 사기입니다. 이미 십일조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헌금하시되 은혜받은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것에 대해 자발적으로 하게 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십일조를 강요하면 이는 조직이 무너질까 두려워하는 심보에 불과하며, 이렇게되면 교회가 일종의 계모임으로 전락되어 자기 조직의 확장과 발전의 위해 하는 기부금에 불과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서 십일조를 한번도 거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발적인 헌금만 있었습니다. 복음서 이후 십일조 이야기 한 곳 있습니까? 어디에도 없습니다. 초대 교회는 철저히 예수님만이 복된 소식이요 하나님께 드려진 십일조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몸과 피를 먹고 예수 안에서 연합한 자로 살아가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몸을 포함하여 전 재산을 다 하나님을 위해 사용합니다. 이런 생활을 했기 때문에 바울이 헌금을 할 때 형편에 따라 예수님의 몸인 형제들을 위해 다 사용할 것을 권했던 것입니다. 어떨 때는 분에 넘치기까지 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십일조 되시는 예수님께 우리가 연합된 자들이기에 우리의 몸이 가는 곳에 우리의 전 재산 역시 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8-29절에서 십일조를 먹게 한 자들이 있습니다. 신 14:28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 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축복을 주시리라.

왜 십일조를 삼년 끝에 모아두었다가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에게 먹게 합니까? 여기 먼저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어떤 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에 의해 얻어먹는 자들입니다. 레위인은 분깃이 없습니다. 객(떠돌이 이민자들 -전쟁으로)과 고아와 과부는 당시에 자기 힘으로 못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들 모두에게 모아둔 십일조를 먹게 하라는 것은 이들이 먹게 하여 생색내라는 것이 아니라, 저기 십일조를 먹고 있는 저들이 하나님 것으로 배부르게 되는 것 같이 자신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십일조 덕분에,(예수님 덕분에) 나도 이렇게 즐거워하게 된 인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먹고 있는 저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를 보면서 말입니다. (물론 오늘날의 고아나 과부나 객과는 다른 차원이다.)

그러니 십일조를 이와 같은 이들에게 먹게 한다는 것은 나 자신도 역시 저 사람과 같은 신세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 십일조 했다. 아 내가 교회 헌금했다. 이것이 다가 아니라 나는 저렇게 은혜를 모르고 살아가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헌금을 할 때 십분의 일을 하던지 십분의 구를 하든지 어떻게 헌금하든지 간에 그것은 여러분들이 주께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표시로 하시고 단, `나는 헌금했으니, 십분의 일을 때서 교회 내었으니 할 도리를 다했다.` 그르지 마시고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나는 십일조이신 예수님 덕분에 내게 빼앗기지 않는 안식과 즐거움이 생겼다는 것을 믿고 주 예수님만 자랑하며 사랑하는 자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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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서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으로 가서

무릇 네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우양이나 포도주나 독주등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네 성읍에 거하는 레위인은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니 또한 저버리지 말찌니라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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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의 완성이신 예수님(아직도 십일조를 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복음을 거부하는 것이다)
신명기14:22-29
주안교회 손무성목사

인간은 자기라는 존재가 먼저이기 때문에 자기 쪽에서 항상 생각하고 결정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우리가 숲 속을 걸어 가다보면 새들이 지저귑니다. 이 때 새소리를 듣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그 새의 소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우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노래하는 듯 들릴 뿐입니다. 마치 얼마 전에 남편을 잃은 사람 같으면 비둘기의 소리는 구슬픈 울음소리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네가 나의 구슬픈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그러나 한창 사랑에 빠져 있는 연인들의 귀에는 `구꾸르 구구`하는 소리는 서로 좋아서 비둘기 연인들끼리 애정을 표현하는 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순전히 자기 쪽에서 자기 생각을 가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쪽에서 정해 놓고 자기 마음을 표현했을 뿐입니다. 지금 자신의 처지가 어떠하냐? 지금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모든 말씀을 대할 때도 나타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십일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평소 내가 물질적인 아쉬움을 해결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십일조를 언제나 자기 관점에서 대하려고만 합니다. `어떻게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는가? 복 받는 비결이 무엇인가?` 그러나 이것 역시 자기를 어떻게 살찌울 것인가 하는 것밖에 들어 있지 않는 사고방식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을 살펴보면서 어디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신에게 관심 가지라고 구원하신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구원하신 분에게 관심을 가지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십일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어떻게 십일조 하면 복 받을 것인가에 관심이 있겠습니까? 아니면 도대체 십일조가 무엇인가? 어찌해서 십일조를 하게 하셨는가? 왜 십일조가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이 되는가? 여기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일조 속에 나타나 있는 본래 정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십일조 내라가 아니라 십일조이신 예수님을 왜 믿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에게 십일조 하라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십일조를 통해 바른 인간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에 십일조의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저도 크면서 십일조를 강조하는 교회에서 항상 교육받은 초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일조를 때먹지 말고 십일조를 잘하면 복 받는다. 십일조를 어떻게 할 것인가? 온전한 십일조는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는 것이다.` 뭐 이런 것에 초점을 맞추어 교육받았습니다. 그러나 십일조의 의의는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십일조에 대해 있듯이 어떻게 내느냐가 목적이 아니라, 모아진 십일조가 어떻게 흥겹게 즐겁게 기분 좋게 쓰이느냐? 그리고 누구에게 쓰여지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26절에 보십시오. 신 14:26 무릇 네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우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십일조를 누구와 함께 먹으면서 즐거워합니까? 바쳐진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서 자신과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하랍니다. 왜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까? 먼저 십일조의 출처가 어디인가부터 봅시다. 십일조의 출처는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토지에서 나왔습니다. 이 토지는 그냥 토지가 아닙니다.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얻어진 토지입니다. 이곳 저곳에는 어린양의 피가 근거가 되어 소산이 나왔습니다. 그러니 십일조의 소산은 어린양의 희생의 결실이었습니다. 이 결실을 가지고 누구와 먹었다고요. 자기와 자기 권속들과 같이 먹고 즐겼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희생의 결실인 십일조를 가지고 자신과 권속들과 같이 먹게 했다는 것은 이 일로 말미암아 같이 길이길이 어린양의 희생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땅에서 난 십일조 먹으면서 `이 사람아 우리가 지금 무엇을 먹고 있는가? 잊지 말게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어린양의 희생의 피로 말미암아 얻은 땅에서 난 것을 먹고 있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지금 즐거워하며 기뻐할 수 있게 되었네. 자네는 이것을 아는가?` 이 말입니다.

그러니 구약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려진 십일조로 자신과 자기 권속들과 같이 앉아 먹으면서 즐겼다는 것은 `나는 하나님의 희생 덕분에 공짜로 이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즐겁고 기쁜 일이 벌어졌다.` 는 말입니다. 마치 우리 교회가 이 지하에 세를 주고 모이고 있습니다. 세를 주고 붙어 있다는 것은 이 지하실이 우리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지하실에 붙어 살 수 있게 된 것이 주인이 투자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마찬가지 구약에 십일조를 내었다는 것은 땅이 자기의 힘으로 얻었다든지 자기 것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따로 있는데 그 주인 덕분에 이렇게 붙어 살게되었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이런 취지에서 했습니다. 십일조 내면서 무조건 먹고 즐기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토지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의 덕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즐겁고 기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잔치가 십일조 내면서 하는 잔치였습니다.


그러면 최초의 십일조를 봅시다. 최초의 십일조는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출발합니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언제 했는가 하면 자기 조카를 구하기 위해 318명의 사람을 데리고 나가 수만 명의 군대를 이겼습니다. 이 때 이기고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오는데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이 나와 떡과 포도주로 환영했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알았습니다. 자기가 나가 싸워 이긴 전쟁이 자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그 전쟁을 이기게 배후에서 역사 했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리품 중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바쳤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장차 아브라함과 똑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 있게 하여 그들 역시 세상을 이기게 하고 마귀를 이기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다시 말하면 십일조 받는 쪽이 십일조 주는 쪽을 반듯이 구원해 주겠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하나님께 하고 그 바쳐진 것을 도로 환원하여 자기와 권속들과 같이 나누어 먹으면서 `내가 지금 즐기고 있는 인생은 내가 뭐 잘나서 내가 얘를 써서 기뻐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십일조 받으신 하나님의 덕택입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과거도 내 것이 아니었고, 현재도 내 것이 아니요, 미래도 내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덕분에 과거도 즐겨왔고 현재도 즐기고 있고 미래도 즐길 것입니다.` 이 말입니다.

지금까지 말씀해 온 것을 정리하면 십일조 속에서 1)내 쪽에서 받아서 환원하여 드리는 것 2)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즐기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오늘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몸이요 예수님의 피인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땅, 곧 어린양의 피 덕분에 얻은 땅에서 얻은 소산을 바치고 그것을 얻어먹고 즐거워했습니다. 이것을 신약에 와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어린양 되는 예수님의 몸을 바쳐서 거기에서 나온 피 덕분에 우리는 죄 용서 받고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니 우리가 먹고 즐기는 십일조는 바로 하나님에게로부터 나온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즐거워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십일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십일조를 드리면서 함께 권속들과 먹고 즐기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을 되돌려서 하나님의 권속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십일조구나. 그러면서 십일조를 하면서 구원에 참여했습니다.그러나 이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예수님의 몸이 드려지고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아 이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말미암아 구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하나님께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영원히 즐거워하며 기뻐할 수 있는 것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받쳐진 십일조 되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돌려 그 몸과 피를 빙 둘러앉아 뜯어먹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신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곧 예수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길을 가며 같은 처지를 당하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한 덩어리, 연합이 되라고 합니다.

우리가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 가지고 즐거워하는데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모여 즐거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편입시험 합격했다든지 대학원 시험에 붙었다든지 결혼해서 신혼여행 잘 다녀와 내가 원하는 가정 꾸미게 되었다고 즐거워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지요. 아니면 내 자식이 앞으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자신이 좋은 직장에 취직하거나 앞날이 훤하게 튀기 위해 모인 것도 아닙니다. 만약 이런 생각으로 교회 왔다면 모두 자기 혼자 생각에서 교회 온 것입니다. 마치 숲 속을 지나가다 자기 슬프니까 비둘기 소리 듣고 `아 저 비둘기도 내 마음을 알고 저렇게 울구나.` 오직 자기 혼자 생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비둘기는 그냥 자기 동료에게나 아니면 자기 나름대로의 소리를 내고 있는 중입니다.

마찬가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십일조를 하게 한 것은 자기 처지를 생각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신 십일조 되시는 예수님 아버지께 드려져 받으셨기에 예수님과 같이 즐거워하고 예수님이 아버지로 인하여 살아가신 것 같이 우리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이 아버지께 드려진 덕분에 우리가 아버지께로 갈수 있게 되었으니 예수를 바라보고 그 분만을 믿는 자, 사랑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 오심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돈이나 짐승이나 물건으로 드려지는 십일조는 끝이 났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십일조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십일조를 모르는 사람들은 아직도 십일조를 해야 복 받는 것처럼 말라기를 인용하고 마태복음에 나와 있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라고 하면서 아주 강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왜 마태복음에서 십일조를 강조하고 있는가 하면 십일조의 정신을 놓쳤다는 것 때문에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을 정확하게 보면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래놓고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 말씀은 인간들이 예수님 당시에 십일조를 어떻게 했는가 하면 양념의 십분의 일, 즉 깨 수확하면 십분의 일 바치고, 소금 수확하면 십분의 일 바치고, 쌀 수확하면, 월급타면 십분의 일 바치고, 보너스 타면 십분의 일 바치고, 은행이자 받으면 십분의 일 바치고, 용돈 받으면 십분의 일 바치고 다 했습니다. 그런데 빠진 것이 있었습니다. 의와 인과 신은 못 드렸습니다. 아무도 못 드렸습니다. 곧 이 말은 인간들이 수입의 십분의 일은 하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십일조가 드려져서 의와 인과 신을 발생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돈이나 물질이 이것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십일조 했다고 좋아했습니다.
분명 인간이 이것들을 만들 수 있었으면 계속 십일조 내고 복받아 라고 했겠지요. `의(judgment)와 인(mercy:은혜, 자비)과 신(faith:믿음)`은 하늘로서 오신 분에 의해서만 만들어지고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3:21에 이제는 율법(십일조도 포함)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요한복음1:16-17절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그리고 히브리서12:2 절 믿음의 주(the author: 창시자) 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정 의와 인과 신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예수님께서 완전히 하나님께 드려진 십일조가 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라는 것은 구약이 끝나는 시점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만들 드려봐 라는 것입니다. 정말 십일조를 알았다면 의와 인과 신을 자기들이 못 만들어 내고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고 진짜 십일조를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몰랐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십분의 일 쪼개 십일조 헌금한다고 십일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직도 구약의 율법에 얽매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예수님을 십일조로 믿고 예수님과 연합한 자로서 즐거워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참 웃기는 것은 다른 율법은 다 완성되었다고 하면서 왜 굳이 십일조만은 하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율법에 여자가 남자가 입는 옷을 입지 말라고 하는 것은 금하지 않습니까? 왜 면과 화학섬유 합성 옷 입지 말라고 하지 않고, 무당 잡아죽이라고는 하지 않습니까? 다해야 하지 않습니까? 왜 그런 것은 완성되었다고 하면서 꼭 돈과 관련된 십일조는 완성되었다고 왜 말 못하는지 속이 보이지 않습니까?

관심이 딴데 있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만약 아직도 구약의 십일조 개념으로 십일조 하면서 안하면 저주 받고, 하면 복받는다는 식으로 한다면 이것은 엄연한 사기입니다. 이미 십일조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헌금하시되 은혜받은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것에 대해 자발적으로 하게 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십일조를 강요하면 이는 조직이 무너질까 두려워하는 심보에 불과하며, 이렇게되면 교회가 일종의 계모임으로 전락되어 자기 조직의 확장과 발전의 위해 하는 기부금에 불과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서 십일조를 한번도 거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발적인 헌금만 있었습니다. 복음서 이후 십일조 이야기 한 곳 있습니까? 어디에도 없습니다. 초대 교회는 철저히 예수님만이 복된 소식이요 하나님께 드려진 십일조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몸과 피를 먹고 예수 안에서 연합한 자로 살아가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몸을 포함하여 전 재산을 다 하나님을 위해 사용합니다. 이런 생활을 했기 때문에 바울이 헌금을 할 때 형편에 따라 예수님의 몸인 형제들을 위해 다 사용할 것을 권했던 것입니다. 어떨 때는 분에 넘치기까지 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십일조 되시는 예수님께 우리가 연합된 자들이기에 우리의 몸이 가는 곳에 우리의 전 재산 역시 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8-29절에서 십일조를 먹게 한 자들이 있습니다. 신 14:28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 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축복을 주시리라.

왜 십일조를 삼년 끝에 모아두었다가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에게 먹게 합니까? 여기 먼저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어떤 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에 의해 얻어먹는 자들입니다. 레위인은 분깃이 없습니다. 객(떠돌이 이민자들 -전쟁으로)과 고아와 과부는 당시에 자기 힘으로 못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들 모두에게 모아둔 십일조를 먹게 하라는 것은 이들이 먹게 하여 생색내라는 것이 아니라, 저기 십일조를 먹고 있는 저들이 하나님 것으로 배부르게 되는 것 같이 자신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십일조 덕분에,(예수님 덕분에) 나도 이렇게 즐거워하게 된 인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먹고 있는 저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를 보면서 말입니다. (물론 오늘날의 고아나 과부나 객과는 다른 차원이다.)

그러니 십일조를 이와 같은 이들에게 먹게 한다는 것은 나 자신도 역시 저 사람과 같은 신세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 십일조 했다. 아 내가 교회 헌금했다. 이것이 다가 아니라 나는 저렇게 은혜를 모르고 살아가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헌금을 할 때 십분의 일을 하던지 십분의 구를 하든지 어떻게 헌금하든지 간에 그것은 여러분들이 주께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표시로 하시고 단, `나는 헌금했으니, 십분의 일을 때서 교회 내었으니 할 도리를 다했다.` 그르지 마시고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나는 십일조이신 예수님 덕분에 내게 빼앗기지 않는 안식과 즐거움이 생겼다는 것을 믿고 주 예수님만 자랑하며 사랑하는 자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기사게재일: [2003-04-26 오후 1: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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