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장로 권사 집사 의 역활
한국 교회에서 권사(勸士, exhorter)는 영성과 희생적인 봉사의 대명사로 통한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권사에 대한 이미지를 기도 많이 하고 열심히 봉사하는 교회 직분자로 인식한다(장로 교회와 감리 교회는 권사의 기준이 다르다. 이 글은 여성도 리더십으로서 권사를 다룬다).
한 교회의 성장 이면사에는 권사의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을 한두 줄로 다 담아내기가 어렵다. 그만큼 권사의 책무가 컸기 때문이다. 아무리 시대를 달리한다 해도, 한국 교회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한 여종들의 몫은 결코 과소 평가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름 모를 수많은 여종들이 주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으리라 확신한다.
이제 시대는 달라졌다. 변화에 따라 여교우들의 지도력에도 옷을 바꿔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본질을 수호하고 강화시키기 위한 자기 변신이다. 외부로부터 강제된 변화는 변질로 이어진다. 스스로 변화는 성숙으로 열매를 맺는다. 모든 지도력이 그러하듯 권사로 대변되는 여성도들의 올바른 리더십의 방향은 무엇인가?
R&D에 투자하라
여성 지도자로서 올바로 서기 위해 R&D(연구 및 개발)에 투자해야 한다. 남을 이끌기 위해서 먼저 자신을 이끌 수 있어야 한다. 목회자 재교육이나 장로 재교육에 대한 소리는 높지만, 권사 재교육에 대한 소리는 드문 편이다. 일상적인 교회 생활을 통해 공급받는 영적 자양분을 섭취하는 기회는 모든 여성도들에게 열려 있다. 타인을 이끄는 자는 타인의 수준에 머무는 순간, 지도력을 상실하게 된다.
여성 지도자로서 자리매김하려면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자기 발전의 정규적인 기회를 붙잡고 있어야 한다. 사용하지 않는 근육이 뻣뻣해지듯, 생각도 뭉쳐 있으면 경직되게 마련이다. 생각을 새롭게 하고 안목을 확대하기 위해 의도된 자기 발전의 프로그램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자아상을 항상 신선하고 창의적으로 유지하려면 치열한 자기 발전에 대한 열망이 필요하다.
지성과 영성의 조화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땀과 수고의 열매이다. 아날로그 시대와 디지털 시대의 리더십의 이미지는 같을 수 없다. 유형무형으로 연구와 개발에 대한 청사진을 수립하지 않으면 결정적인 시기가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고 만다. 나이나 관록으로 교우들을 이끌지 말고, 삶의 분별력과 통찰력으로 이끌어야 할 시대가 이미 왔다.
칭찬 받는 시어머니가 되자
지도자의 가정은 그 사람의 참모습을 말해 준다. 부분적이겠지만 ‘권사 시어머니 때문에 교회에 다니기 싫다’는 뼈아픈 사연이 심심찮게 들려오는 이유는 가정 사역의 적신호 때문이다. 가정에서 지도력은 하루 아침에 행사된 것이 아니기에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가정을 강하게 꾸리는 모습과 맞물린 권사의 모습은 산업화로 인한 가장 부재 시기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고부간에 인터넷을 통해 의사를 소통하는 지금은 일방적인 영향력 행사보다 쌍방적인 대화에 무게가 실린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 대상을 이해하고 열린 마음의 대화가 기본이다. ‘믿습니다’ 스타일이 효험을 발휘할 때도 적지 않지만, 오히려 반작용을 불러오는 경우도 많다. 권사가 주님과 깊은 대화를 기도라는 도구를 통해 맛보듯, 세대가 다른 사람들을 기도하듯 품는다면 수평적인 교제의 원만함을 이룰 수 있다. 칭찬 받는 시어머니 권사는 지도력의 많은 부분을 보여줄 것이 분명하다.
덕이 있는 여론을 형성하라
권사라는 직분 자체가 여론 형성의 중심에 서게 된다. 교회는 말이 많은 곳이다. 사람이 많으니 생각도 많고, 생각이 많으니 말도 많은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말을 말로 다스리는 역할의 선봉에 권사가 서 있다. 실상 교회의 모든 여론 형성의 진원지는 권사의 ‘입’일 때가 많다.
여론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권사의 역할이 거의 절대적이다. 많은 권사의 남편들이 교회의 중요 멤버로 뛰고 있다는 사실과 베갯머리 송사를 이겨내는 남자가 드물다는 고래(古來)의 말을 생각할 때, 교회 여론은 권사의 성향과 호불호(好不好)에 달려 있다. 축복된 여론을 확대 재생산하든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여론을 확대 재생산하든지 권사는 입술을 제어하는 지혜자가 돼야 한다. 교회의 여론 형성을 발전적으로 이끈 몫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권사가 많은 교회는 늘 생기가 넘쳐난다.
사도 바울은 어떤 여성들이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는” 사실에 주목하고 마음 아파했다. 이러한 여교우들을 누가 바로 잡을 것인가? 삶으로 인정받는 여성 지도자인 권사의 몫이 아니고 누구의 몫이겠는가! 말 많은 권사가 될 것인가? 덕이 많은 권사가 될 것인가? 선택의 몫 역시 권사들에게 달려 있다.
목회의 후원자로 서라
목회자가 힘들어 할 때 기도의 막강한 후원 부대는 영적인 천군만마를 얻음과 다름이 없다. 구약이나 신약에서 영적 지도자의 든든한 후원자들의 이름 중에 여성도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엘리야의 후원자 사르밧 과부, 엘리사의 후견인 수넴 여인, 사도 바울의 사역에 힘을 돋운 여러 여성도들의 이름이 서신서 뒷부분을 인상 깊게 채우고 있다. 모성애적 마음으로 목회자의 동반자로서 묵묵히 사역을 감당하는 권사의 모습은 목회자는 물론이고 교우들에게도 큰 감동을 준다.
주님께서 여성 지도자의 섬세하고 끈질긴 성품을 사용하셔서 흔들리는 목회자를 세우시고, 낙심한 목회자에게 용기를 불러일으키신다. 권사들의 다른 별명이 ‘기도의 어머니’란 사실이 목회자의 동역자란 사실을 힘있게 증거하고 있다. 권사들의 팀워크를 통해 강력한 영적 진지가 구축되면 교회는 평안을 누리게 된다. 한국 교회의 권사 제도는 목회자와 교회에 힘을 실어주는 하나님의 사려 깊은 선물임에 분명하다.
말씀의 분별력을 소유하라
이단 사상이 난무하는 한국 교회의 형편이다. 기독 언론을 표방하는 신문이나 방송조차 못 믿을 세상이 되었다. 가짜가 진짜보다 더 그럴 듯하게 꾸미고 나오는 것은 동·서양에서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일이다. 여교우들을 무차별 공격하는 이단들의 시도를 최일선에서 분별하고 막아야 하는 위치가 권사들이다. 어떤 일이든지 목회자에게까지 보고돼 상황을 타개하기까지 사안에 따라 다르지만 제법 시간이 걸린다.
이때 분별력 있는 권사가 초동 진압 작전의 선봉에 서서 자신의 몫을 잘 감당하면 교회는 이단 사상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게 된다. 그러나 초기 대응에 실패하고, 심지어 권사 자신이 포섭의 대상이 된 상황이라면, 예삿일이 아니다.
온 교회가 소용돌이에 휘말려 영적으로나 인간 관계에서 큰 상처를 받는다. 꼭 이단의 문제뿐 아니라, 교우들의 삶에는 복병처럼 숨어 있는 일들이 많다. 축복된 일에는 교역자와 협력해 축하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교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여러 문제에 대한 사전 예방 사역이다. 일이 터진 후 치료는 예방 사역보다 몇 배의 인적 물적 요소가 투자돼야 한다. 어떤 일은 거의 회복 불능인 경우도 있다.
시대를 앞서 읽어냈던 에스더처럼 통찰력을 소유한 권사들은 교회의 영적 지킴이다. 얼마나 많은 위태로운 일들이 권사들의 분별력에 의해서 사전에 정리되었는지 모른다. 특수 부대 군인들이 탐지기로 묻혀 있는 지뢰를 찾아내듯, 권사들의 영적 레이더가 교회의 영적 풍향을 주도한다.
기독교 역사 2000년의 지혜를 담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가정 중심, 목회자 중심’의 검증된 생활 원리는 건강한 교회에 직·간접으로 축복이 되었다. 사람과 사물을 대할 때 따뜻한 마음과 예리한 분별력으로 자신의 성숙함을 도모하고, 교회에 축복을 가져다 주는 권사라는 직분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존중받아 마땅하다.
빛과 소금/글·오정호 대전 새로남교회 담임 목회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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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의 역할
열차를 타고 달리다가 차창 밖으로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을 보게 된다. 마을 가운데 있는 아담한 교회와 솟아오른 십자가는 보는 이에게 정겨움과 평화로움을 전해 준다. 그런 교회 모습의 이면에는 성도들, 특히 이름 모를 영적 지도자들의 치열한 주님 사랑이 배어 있다. 그렇다. 평신도 지도자인 장로는 아름다운 희생과 성숙한 인격의 대명사였다. 적어도 한 세대 전에는 이에 대해 교회 안팎으로 이의를 다는 이는 없었다.
오늘의 장로상(長老像)은 무엇으로 채우고 있는지 궁금하다. 누가 뭐래도 한국 교회의 큰 이미지는 목회자와 장로의 합작품임에 틀림없다. 장로의 인격에 한국 교회의 미래가 달려있다는 말이 결코 과장된 이야기는 아닐 성 싶다. 장로의 직분 자체는 성경에서 증거하는 대로 존귀하다. 누가 장로의 직분에 대해 폄하한다면 덕스럽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장로 직분을 수행하는 당사자 역시 인격이나 사역에서 ‘공사 중, 수리 중’임을 어찌 부인할 수 있을까.
장로는 섬김의 시작인가, 끝인가
장로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하거나 더럽히는 것은 장로의 속 깊은 곳에서 출발한다. 강원도 태백시에 있는 함백산 계곡이 낙동강 1,300리의 발원지인 것처럼, 장로 영혼의 지성소 상태가 어떠하냐에 따라 섬김의 출발과 종착을 결정한다. 이상하게도 한국 교회에서 내려오는 말 가운데 없어져야 하지만, 갈수록 힘을 얻고 있는 것이 “그 사람 장로 되더니 사람 버렸다”는 식의 말들이다.
장로직의 생명은 순전성(integrity)에 있다. 주님과 교회에 한 몸 드려 섬기겠다는 의지는 주님의 영광과 교회의 성숙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에 반해 장로직을 통해 얻는 유·무형의 보너스에 관심이 집중돼 있다면, 개인과 장로 직분의 추락은 시간 문제다. 장로됨이 섬김과 희생의 출발이라고 인식할 때와 존경받고 다스리는 직분이라고 인식할 때 나타나는 양상이 같을 수 있겠는가?
주님께 인정의 도장을 받아라
교회 시무 장로는 당회원으로서 각 치리회(당회, 노회, 대회, 총회)에서 목사와 같은 권한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권한을 가진다. 직분 수행을 하다보면 자연히 많은 서류를 접하게 되고, 도장 찍는 재미에 빠질 수 있다. 그것이 체질화되면 자신의 발전과 성장을 위한 것으로 중심 이동이 이뤄질 수 있다.
나중에 도장 찍고 일 처리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다. 무릇 장로의 직분을 받은 이는 주님께 인정과 신뢰의 도장을 받아야 한다. 성도들이 이구동성으로 “저 장로님처럼 교회 생활하고 싶다.” “저 장로님 가정처럼 살고 싶다”는 여론이 형성된다면 역할 모범의 본래적 사명을 이룬 것이다. 장로 직분은 서류에 도장 찍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풍겨 나오는 주님의 향기로 일하는 것이다.
담임 목사의 목회에 꽃피우게 하라
만약 장로가 반석 같은 목회 철학이 있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이는 쉽게 깨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장로에게는 섬김과 충성의 철학만 있을 뿐이다. 담임 목회자의 목회 철학에 동역해 건강한 교회를 세우겠다는 의지가 불탈 뿐이다. 장로의 참다운 동역은 자신의 철학을 버리고 담임 목사의 목회 방향에 온전히 적용할 때 조화를 이룬다.
왜 수많은 교회에서 담임 목회자를 청빙해 잔칫집처럼 출발했다가 초상집처럼 갈라서는가? 이유는 철학과 철학, 이론과 이론, 권위와 권위가 맞부딪쳤기 때문이다. 마치 갈라디아교회의 교우들이 성경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형국과 비슷하다. 목회자를 철저히 검증 절차를 거쳐 청빙하든지, 아니면 아예 청빙하지 말든지 해야 한다. 청빙해 놓고 소신껏 목회를 감당하지 못하도록 갖은 방법으로 흔들고 어지럽히는 것은 무엇인가?
장로가 철옹성 같은 목회 철학을 소유하는 한 목회 현장에 은혜의 봄바람이 불기는 어렵다. 여러 장로들의 모임에 참석 빈도가 높을 수록 목회에 대한 규제도 심해진다고 느끼는 것은 목회자들만의 느낌인지 자문해 볼 일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함께 동역했던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에 대해 감동을 받아 후세에 전한다.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롬 16:4). 이런 목회자와 동역자 간의 가슴 뭉클한 순애보는 과거의 일로만 기억될 것인가. 우리 시대의 장로와 목회자의 결단이 필요하리라.
돈을 좋아하지 말고, 도를 좋아하라
왜 일반 시민들이 장로와 돈을 오버랩 시킬까. 개발 논리에 따라 ‘잘 살아 보세’ 함성이 전국을 뒤흔들었을 때 교회만이라도 ‘올바로 살아 보세’의 원리를 붙잡았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는 국민들의 마음속에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깨끗한 이미지로 자리잡았을 것이 분명하다.
장로는 돈을 좋아하지 말고 도(道, 말씀)를 좋아해야 한다. 교회 건축 과정에서 이권에 개입하다 망신당한 장로가 어디 한두 사람인가.
온몸을 통째로 드려 헌신하는 품격 있는 장로가 있는가 하면, 온몸으로 뛰어 돈 되는 일에 몰두하는 장로도 있다. 건축 중인 어느 목회자가 이미 건축이 끝난 이웃 목회자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던 중에 제일 먼저 들은 말이 “목사님, 절대로 장로를 믿지 마십시오”이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장로는 경건의 능력으로 돈을 다스리는 모습을 실제로 교우들에게 보여주는 역할 모범의 선두 주자이며, 향도적 사명을 가진 자이다. 세상 사람이 돈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하더라도, 장로만은 돈에 대해 높은 표준을 가지고 자신을 다스리기를 교우들은 기대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자신들이 그렇게 사는 것이 쉽지 않기에 장로들의 삶에서 희망의 불씨를 보기 원하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돈 냄새나는 장로가 아니라, 예수 냄새나는 장로에 목말라 한다.
간증 많은 장로로 서라
장로는 선견자가 돼야 한다. 시대를 앞서가는 교회가 되려면 먼저 보고(先見), 바로 보는(正見) 지도자가 필요하다. 먼저 보고, 바로 본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시대를 분별하는 통찰력과 고상한 인격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자칫 장로직을 오래하다 보면 자신의 주장이 많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이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매사에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이끌어 주신 간증이 많다는 증거이다. 자기 주장은 교우들에게 부담을 준다. 교우들을 억압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증은 교우들에게 기쁨을 준다. 교우들의 마음에 성령의 바람이 불게 한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느 2:8, 18)에 대한 다양한 체험이 있었다. 은혜 받은 자의 모습 그 자체이다.
간증이 많은 장로가 여러 명 있을 때 교회는 예외 없이 정면으로 장애물을 돌파할 수 있는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태산이 평지가 되는 은혜로운 역사도 체험한다. 이에 반해 자기 주장이 많은 장로가 있는 교회는 될 일도 되지 않는다. 역사의 진보는 커녕 현상 유지도 힘들다.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교회들을 들여다보면 거기에 반드시 간증이 충만한 평신도 지도자들이 포진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학력 지수나 경제 지수도 좋지만 은혜 지수가 장로의 대명사가 돼야 당사자도 살고 교회도 산다. 교우들을 인도하려고 소매를 걷어올리기 전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 무릎을 꿇는 장로는 하나님과의 역동적인 교제를 통해 많은 간증을 추수하게 된다. 교회의 보물 같은 장로는 은혜 지수가 높아 성도의 신앙 지수를 상향 조정한다.
예배 기도는 짧게, 개인 기도는 길게
초신자에 대한 배려는 교회 내에서 다양하게 이뤄진다. 대표적인 것이 목회자의 메시지와 장로의 예배 기도이다. 목사의 메시지가 교우들에 대한 따뜻함이 배어 있지 않으면, 교우들은 영적 영양 실조를 벗어나지 못한다. 동일하게 장로의 예배 기도가 교우들을 민감하게 배려하지 않으면, 교우들은 기도 생활에 대한 참신한 맛을 보기도 전에 기도에 식상해 한다. 회중의 눈을 뜨게 해놓고 주제 없는 메시지를 펼치는 것과 회중의 눈을 강제로 감게 해 놓고 중심 없는 기도를 강요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설교자에 대한 배려로서 예배실 뒷면에는 반드시 큰 회중 시계나 디지털 시계가 자리잡고 있다. 설교 시간과 예배 시간에 대한 무언의 또 다른 메시지인 셈이다.
그런데 장로가 담당하는 공적 예배의 기도는 모두 눈을 감고 하니 개인적 제어 장치가 사라진다. 주관적 감각의 시계만 기도자의 마음 속에 자리잡는다. 주관적이라고 다 나쁠 수는 없다. 영적으로 둔감해지면 회중은 눈을 감은 채 미로를 헤맬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경우도 많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다반사다. 목회자의 설교가 기다려지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면, 동일선상에서 장로의 기도가 기다려지는 교회가 되는 것도 축복이다. 장로들의 기도 시간이 마치 고문당하는 시간처럼 지레 겁을 먹는 교우들도 많이 있다. 진정으로 주님과 회중을 사랑한다면 개인 기도를 깊고 오래하고, 예배 기도는 생수 터지듯 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예배 기도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 업그레이드해야 할 때이다.
장례식에서 목사의 눈에 눈물 흐르게 하라
목사가 가장 영광스러울 때가 바로 장로 장례식의 집례이다. 충성된 장로, 온 교회의 사랑을 받던 장로의 죽음은 말이 장례식이지 교회의 영적 갱신이 일어나는 또 다른 잔치라 할 만하다. 조객들과 집례자의 눈에 맺히는 눈물은 고인에 대한 감사와 그의 믿음의 행적이 보여주는 감동에 대한 거룩한 답례이다. 이런 장례식은 교회에 힘을 준다. 비록 이별의 아픔이 있지만 만남의 소망도 크기에 성도들은 믿음 안에서 더욱 견고하게 선다.
그런데 장례식이 집례자에게 가장 곤혹스럽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집례자와 조객, 성경 본문과 찬송, 심지어 순서도 동일하지만 오직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바로 고인이 된 장로의 생전의 믿음 생활 때문이다. 명목상의 장로였는지, 실제로 장로처럼 살았는지 주님은 물론이고 사람들은 알고 있다. 대놓고 말을 안 했을 뿐이지 교회 회중이 다 알고 있다. 인생의 결론이 예수 닮은 장로인가? 세상 닮은 장로인가? 자신을 위해 교회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는가? 교회를 위해 자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는가?
어떤 태도로 살아온 장로인가가 인생의 결론이다. 우리는 인생 최후 순간에 집례 목사의 눈에 뜨거운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장로가 그리워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글 |오정호 대전새로남교회 담임 목회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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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리더십을 위한 추천 도서
리더십의 용기
교회만이 세상의 희망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 저자는 지역 교회의 리더야말로 세상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저자의 30년 리더십에 대한 정리로 리더들이 꼭 갖춰야 할 기능, 성품, 영역에 관해 설명한다. 특히 저자는 이론을 넘어 검증된 리더십의 실천에 집중하고 있어 현실적으로 도움을 주고자 애쓴다(빌 하이벨스 지음, 두란노).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인도자들
아직도 교회에는 장로 제도에 대한 오해들이 존재하고 있다. 저자는 장로직을 정의하기 위해 성경의 권위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다. 이 책은 성경에서 말하는 장로 제도의 의미를 정확히 정의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1부에서 성경의 장로직에 대한 5가지 주요 특징들 즉 목회를 위한 지도력, 분담 사역, 남성에 의한 사역, 자격자들에 의한 사역, 종의 자세를 갖춘 지도력 등을 다룬다. 2부에서 장로에 의한 지도력 구조를 다루고, 3부에서는 교회 장로직과 연관된 성경의 모든 말씀을 주해한다(알렉산더 스트라우크 지음, 전도출판사).
교회를 살리는 교회 개혁
교회가 앓고 있는 질병을 더욱 악화시키지 않고 치료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새 시대에 걸맞은 새 지도자들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저자에 따르면, 지도자들은 현상 유지보다 변화의 역군이 되어야 하고, 막연한 평화주의자보다 위험한 개척자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앨런 넬슨, 진 아펠 지음, 생명의 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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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의 역할
‘집사’라는 명칭은 고대 그리스어 디아코니오(diakoneo)에서 유래한다. 이 말은 ‘섬기는 사람’ 또는 ‘안내원’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집사는 자신의 목사를 도와주고 모임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는 일꾼이다. 전통적으로 집사는 성직자라기보다 봉사 사역자로서 인식되어 왔다. ‘집사회’란 말도 단순히 교회에서 집사들의 모임을 뜻한다. 많은 수의 집사들로 구성된 집사회에는 목사가 ‘수석 집사’를 임명해 세운다. 집사의 역할이 봉사자로 머무는 게 아니라, 중요한 리더로서 역할을 갖도록 한다.
집사의 기능은 서번트십
집사회에 속한 집사는 목사, 지역 교회, 교회의 기관들을 돌보고 양육하는 일에 있어서 목사와 장로들을 지원해야 한다. 집사회의 목적은 사도행전 6장에 기록된 말씀을 행하기 위함이다. 집사는 목사, 장로, 지도자들이 기도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사역에 헌신할 수 있도록 시간적 여유와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이런 일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방법에 따라 현재 진행되고 있다. 이런 것들이 집사와 집사회의 기능이다.
집사의 자질에 대해 디모데전서 3장 8∼13절 말씀에서 설명하고 있다. 또 집사의 기능에 대해서도 알려 주고 있다.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인격이 요구되는 집사는 교회가 신중을 기해야 하는 사무와 그 외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성경에는 집사 자격으로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딤전 3:9),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딤전 3:10)라는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집사의 임무가 허드렛일이나 하는 직분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다.
성경에서 ‘일구이언을 하는 자’(8절)는 집사 직분에 적합하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집사가 맡은 일이 일상에서 성도들과 가깝게 지내며 병자를 위문하거나 물질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사역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사역을 하다보면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성도들 간에 구설수에 오를 수 있는 자질구레한 여러 사건들을 접하게 된다. 따라서 이를 여러 사람에게 말을 전해서 소문낼 수 있는 기회도 많아진다. 따라서 집사들은 자신이 접한 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퍼뜨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집사에게 탐심을 떨쳐버리도록 요구하는 것은 그들에게 교회의 재정을 관리하는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말씀 묵상과 기도가 주업무
집사회 조직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집사회를 대표하는 집사장은 목사가 지목한다. 신약 시대 집사의 역할이 사무와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집사는 청지기로서 교회 내 사무와 회계 일을 담당한다(딤전 3:8∼10). 집사장은 교회 내 안내, 경조사, 청소 담당과 같은 여러 일들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각각 팀을 구성한다. 집사장과 각 팀원들은 자주 만나 일에 대해 의논한다.
사도행전 6장 1절에서 8절까지는 집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매우 잘 설명하고 있는 말씀이다. 집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집사는 지역 교회에서 맡은 각각의 역할들을 감당해야 하고 교회에서 잔 손길이 가는 많은 일들에 일일이 신경 써야 한다. 오늘날 집사들이 해야 할 전형적인 임무는 다음과 같다.
예배를 위한 전 과정에서 안내자로서 일반 회중들 돕기, 예배 전후 주차 관리, 헌금을 회수하고 계수해 은행에 입금하는 일, 교회 내 예배와 만남들이 안전하게 이뤄지도록 지원하기, 새신자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필요하다면 그들에게 교통 수단 제공하기, 순번을 정해 전도하러 나가기, 교회 건물은 물론이고 앞마당이나 주차장의 보수 및 관리하기, 교회 건물이 예배와 모임에 적절하도록 준비하기 등이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양들을 먹이는 의무는 목사에게 있다는 것이다. 집사들은 양들의 필요에 집중하면 된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좋은 설교를 들은 양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직접적인 필요가 채워지지 않으면 주님께 돌아오지 않는다.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은 집사들이 자신들의 직분을 탁월하게 수행하는 것에 달려 있다. 집사들은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직분을 정확하게 수행하고 있는지 항상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빛과소금/ 페테 필하버(Pete Vielha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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