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잘못된 에큐메니칼(교회연합) 운동
역사와 세력
오늘날 교회의 또 하나의 중대한 문제는 에큐메니칼(교회연합) 운동이다. 에큐메니칼(교회연합)운동은 세계의 모든 기독교회들을 재연합시키려는 운동이다. 1910년 영국 에딘버러에서의 세계선교대회는 교회연합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1925년 사회정치문제에 대한 기독교 원리의 적용에 관심을 가지고 세계적으로 시작된 생활과 봉사(Life and Work) 운동과, 1927년 교회의 일체성(一體性, unity)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역시 세계적으로 시작된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운동는 연합하여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조직하였다. 이와 같이, 세계교회협의회는 선교, 사회 문제, 교회의 일체성 등의 관심을 가지고 출발하였다. 이 단체는 오늘날 교회연합운동의 주요 결실인 동시에 주요 수단이다.
교회연합운동의 세력은 매우 크다. 2003년 현재, 세계교회협의회는 세계의 약 342개 교단을 회원으로 두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측), 구세군 등도 세계교회협의회의 회원이다.
한 세계교회를 지향함
교회연합운동은 하나의 세계교회를 지향하고 있다. 1954년 세계교회협의회 에반스톤 총회는 “우리의 의도는 연합하는 것”이라고 말했고, 1961년 뉴델리 총회는 “교회의 유형적 일체는 완전히 묶인 하나의 교제에서 나타난다”고 했다. 1975년 나이로비 총회는 “우리는 한 세계적 공동체를 갈망하며 그것을 위해 싸운다”고 말했고, 1983년 뱅쿠버 총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표는 한 거룩한, 세계적, 사도적 교회의 유형적 일체를 이루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런 진술들은 하나의 세계교회를 만드는 것이 그들의 뜻임을 보인다.
1993년 5월, 한국장로교협의회는 예장통합, 기장, 예장대신, 예장개혁, 예장고신 등 다섯 개 교단의 이름으로 교회 일치를 위한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 선언문은 한국교회의 분열이 신학적 정당성을 갖지 않는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한국의 장로교단들은 신앙의 본질적인 항목들에 있어서 결코 분열될 만큼 의견의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남은 문제는 우선 협의회를 통하여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지향해야 하고, 결국은 하나의 한국 장로교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66)
신학적 포용주의
비록 세계교회협의회 헌법이, “세계교회협의회가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주로 고백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신 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들의 공동적 부르심을 함께 성취하기를 추구하는 교회들의 교제이다”라고 진술하지만, 세계교회협의회나 교회연합운동은 교회 안의 다양한 신학들을 비평 없이 포용하는 신학적 포용주의의 입장을 취한다.
교회연합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세계교회협의회와 그 지도자들이 다양한 신학들을 용납하는 데서 드러난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전 총무 에밀리오 카스트로는 말하기를, 세계교회협의회의 공식적 신학이란 것이 없으며 또 결코 있을 수도 없고 우리는 신학적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67) 2000년 2월, 우리나라의 제1회 에큐메니칼 포럼에서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인 박종화 목사는, 교회의 영적 측면을 강조하는 부류와 교회의 사회참여적 역할을 강조하는 부류는 한 동전의 양면과 같으며 이 둘을 포함하는 통합적 에큐메니즘이 크게 강조되어야 한다고 말했다.68)
교회연합운동은 그러므로 서로를 인정하고 성찬 교제를 나누기를 제안한다.69) 1993년 12월, 한국장로교협의회는 1994년 사업 계획으로 강단 교류, 연합 예배 등을 결의하였다.70) 교회연합운동가들은 심지어 교회의 일체성을 위해 교리를 포용적이게 작성하기를 제안한다.71) 이것이 신학적 포용주의이다.
기구적 연합
교회연합운동은 1948년에 세계교회협의회(WCC)라는 세계적 협의체를 구성하였고 각 나라의 교회협의회(NCC)들과 지역적 협의체들을 가지고 있다. 또 미국에는 9개 교단들의 교회연합협의회(CUC = Churches Uniting in Christ)가 있다.
우리나라의 개신교회 17개 교단의 대표들은 한국 개신교 전체를 대표하는 연합기구를 만들기 위해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한국교회 연합을 위한 교단장협의회가 제안한 ‘한국교회의 통일된 연합체 구성 추진’ 헌의안은 거의 모든 교단들에서 통과되었다. 교단장협의회 소속 23개 교단 중 2002년 10월 2일까지 예장합동, 예장통합, 기장, 기성, 예성 등 16개 교단들이 총회 결의로 그것을 채택했다.72)
복음주의자들의 적극적 참여
또한,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은 교회연합운동에 적극적이다. 1983년 세계교회협의회 제6차 총회에서 “뱅쿠버의 복음주의자들”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복음주의자들의 다수파 선언문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도자들이 복음의 핵심을 믿는 자들이며 ‘하나님께서 명백히 받으신’자들이므로, 복음주의자들이 그들로부터 물러나지 말고 그들을 기쁘게 영접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일치와 갱신을 추구하는 모든 노력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우리의 결심을 공적으로 선언할 압박을 느꼈다”고 결론을 내렸다.73)
세계교회협의회도 근래 복음주의자들에게 호의적 손짓을 보이고 있다. 1998년 12월 짐바브웨 하라레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제8차 총회는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 죠지 반더벨드를 주요 연사로 세웠다.74) 또 최근 미국교회협의회(NCC)는 새 조직체의 시작을 탐구하기 위해 천주교인들과 복음주의자들과 함께 만나고 있다.75)
바른 교리는 기독교에 본질적임
그러나 교회연합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바른 교리와 바른 신학은 기독교에 본질적이다. 하나님의 진리들에 대한 체계적 지식인 신학의 중심적 내용은 시대마다 변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서로 모순되는 다양한 신학들을 포용하는 것은 교회가 스스로 모순을 범하는 명백한 잘못이다.
교회의 일체성은 교리적 성격을 가짐
또 교회의 일체성(一體性, unity)은 교리적 성격을 가진다. 성경은 교회의 일체성이 영적, 교리적, 유형적임을 말한다. 교회는 영적으로 이미 하나이며 그 일체성은 결코 파괴될 수 없다. 또 교회는 가능한 한 유형적으로도 일체성을 표현하고 유지하기를 힘써야 한다(고전 1장, 엡 4장). 그러나 오늘날 보다 중요한 점은 교회의 일체성이 교리적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바른 진리 안에서 하나이어야 한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21),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교회연합운동이 성경적이라고 말하지만, 요한복음 17장과 에베소서 4장에 계시된 교회의 하나됨은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의 일체성, 즉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시고 성령께서 인치신 자들의 하나됨이며(요 17:9; 엡 1:3-14), 또 하나님과 그의 진리 안에서의 하나됨이다(요 17:11, 21). 그러므로 워필드는 말하기를, “신약의 그리스도인의 하나됨은 신자들의 공통적 기독교 신앙에 기초했다. 그리스도 안의 하나됨은 그리스도 안의 진리에 대한 불신실함 위에 세워질 수 없다”고 했고,76) 마틴 로이드-죤스도, “진리와 교리를 떠난 하나됨은 없다”고 말했다.77)
교회는 바른 교리를 보수해야 함
더욱이, 교회는 복음 진리를 보수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데살로니가후서 2:15,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遺傳)을 지키라.” 디모데후서 1:13,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 교회가 받은 사도적 교훈들은 개신교회들이 공통적으로 믿고 있는 근본 교리들을 포함하며, 그 교리들은 만국 교회의 일체성의 기초이다.78) 그러므로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존하지 않는 신학적 포용주의는 명백히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
교회는 이단을 배격해야 함
또한 교회는 이단들을 배격할 의무도 가지고 있다. 로마서 16:17, “너희의 [배운]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유다서 3,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는 익히 알려진 이단 종파들 외에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중요한 이단이 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초자연적 사실들과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신성, 그의 형벌적 대속(代贖), 그의 육체적 부활, 그의 재림 등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교회 역사상 어느 이단 종파보다도, 심지어 천주교회보다도 성경으로부터 크게 탈선한 이단이다.79)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지 않는 신학적 포용주의는 이단을 포용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그것은 명백히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다.
교회연합운동이 건전한 교리와 정치원리에 입각한 것이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불필요한 분열을 극소화하고 필요한 연합을 극대화하는 연합주의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 가장 중요한 두 이단은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이다. 교회연합운동은 기독교계 안의 배교적 구성원인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를 배제하지 않고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잘못인 것이다. 교회의 배교와 혼란의 상황 속에서, 교리적 순결성을 무시한 연합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교회 일치라는 명분이 이단을 포용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라고 하였다(고후 6:14-16). 칼빈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거짓이 종교의 성채 속에 침입해 들어오자마자, 요긴한 교리의 요점이 뒤집어지자마자, 교회의 죽음이 초래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 . .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교리 위에 세워져 있다면 . . . 그 교리가 파괴될 때 교회가 어떻게 계속 존속할 수 있겠는가?”80)
초교파적 교회는 바람직한가?
덧붙여서, 교파적 확신의 차이를 무시하는 초교파적 연합 교회가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도 생각해야 한다. 많은 교회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그리스도의 속죄의 범위, 세례의 대상과 방식, 목사의 성격, 교회의 운영방식,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와 방식, 천년왕국과 휴거 등의 교리에 대해 심각한 견해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비록 교회 연합의 과정에서 이단적 요소를 배제한다 할지라도, 또 지리적, 언어적 간격으로 인한 불편은 놔두고라도, 이러한 교리적 견해의 차이를 무시한 연합 교회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물론, 교리적 견해 차이는 주로 진리에 대한 무지나 오해에 기인할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이러한 교파들 간의 차이점들을 고려할 때, 초교파적 교회는 하나님의 모든 진리에 대한 충실한 고백이나 증거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만일 어떤 설교자가 한 특정 교리에 대한 확신 있는 설교를 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어떤 회원들의 양심에 불편함을 줄 것이다. 또한 목사 양성을 위한 신학교는 온전한 교리적 확신을 가르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교파적 차이를 무시한 초교파적 한 교회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며 한 신앙고백이 없는 한 교회는 참으로 하나가 아니다. “단지 하나의 외면적 조직체 때문에 그들이 ‘하나’라는 인상을 주는 것은 단지 교회 밖에 있는 세상을 오해케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거짓말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81)라고 로이드-죤스는 바르게 말했다.
전제주의적 교회를 경계해야 함
또 우리는 중세의 천주교회와 같은 전제주의적 교회를 두려워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여하튼 하나를 만드는 세계적 조직체는 모든 회원을 그것의 통제 아래 놓는 전제주의 교회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사람은 교만하여 남을 지배하려는 경향이 있다. 교회의 일체성보다 중요한 것은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이다. 우리는 전제주의적 천주교회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위해 피흘려 싸웠던 선진들의 투쟁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신앙의 자유라는 종교개혁의 귀한 유산을 잘 보존해야 한다.